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고린도후서
2장 4-5절『내가 마음에 큰 눌림(들맆세오스)과 걱정(쉬노케스)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아가펜)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근심하게(렐뤼페켄)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멜루스) 너희 모두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들맆세오스는
영어로 push(압박)이다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으므로 심령 속의 지성소로 들어오라는 압박을 의미한다. 쉬노케스에서 쉬(함께)와 노케스(소유하다)의 합성어이다. 하나님과 마음을 함께 한다는 의미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가서 야단을 치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막으시므로
가더라도 야단치지 않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하나님이
바울의 마음을 압박하여 심령 속의 지성소로 들어오게 하여 주님의 마음을 알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마음을 깨닫고 보니 눈물로 편지를 쓰게되는 것이다. 바울이 흘리는 눈물은 아가페로 인한 눈물이다. 아가페는 영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고린도교회가 영적으로
상태가 좋지 않은 상태였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세운 사도였는데, 만일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가면 많은 징계를 할 것이 분명한데, 그와 같이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가서 심하게 질책한다면, 질책을 받은 자 외에는 바울을 기쁘게 할 자가 누구인가? 질책을 받은 자가 돌아서면 바울이 기뻐할 일이 되지만, 그런데, 그런 방법은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바울이
질책을 하고, 질책받은 자가 회개하여 돌아선다면 기뻐지만, 역
작용이 일어나면 오히려 근심거리가 되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신도들이 온전히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 바울에게도 고린도교회 신도들에게도 기쁨이 된다고 말한다.
렐뤼페켄(λελύπηκεν)은 잘못에 대해서 고통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누군가가
고통을 주는 자가 있었다면, 그는 바울에게 고통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멜루스는 부분적으로 라는 의미로서, 바울에게 주는 고통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간접적으로 바울이 고통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교린도교회에 그런 짐을 지우지
않겠다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2장 6-8절『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헤 에피티미아)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 그런즉(투난티논)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카리사스다이) 위로할(파라칼레사이)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아가페)을 그들에게 나타내라』
에피티미아(ἐπιτιμία)에서 에피(~위에)와
티미아(가치)의 합성어다.
벌을 받는 것은 번역의 오류다. 바울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이런 사람들은 가치를 더 존중받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투난티논(τοὐναντίον)은 그와 반대로 라는 의미다. 카리사스다이 (χαρίσασθαι)는 호의를 베풀어라 라는 의미이고, 파라칼레사이 (παρακαλέσαι)는
권면하다라는 의미다. 다시 번역하면, 『반대로 너희는 그에게
호의를 베풀고, 권면할 것이니, 그가 질책을 받은 후에 심한
고통을 당할까 염려된다』는 것이다. 아가페는 영적인 사랑으로 영적인 교감 속에서 가치있는 사랑을 나타낸다.
고린도교회
지도자들이 잘못하는 교인들에게 질책하는데, 그들도 주의 말씀에 재대로 순종하는지 바울은 알고 싶다는
것이다. 정말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지, 편지를 통해서 깨달아라는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질책하는 것은 그들을 올바로 인도하기 위함이지만, 사탄에 이용당하지 말고 주님의 마음으로 하라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에서도 올바른 지도자가 필요한 것이다. 지도자가 올바르지 못하면,
결국 모든 폐해는 신도들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바울이 신도들의 잘못을 지적하기 보다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에 차라리 편지를 통해서, 성령의 인도를 통해서 변화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바울이
드로아에 갔을 때, 디도를 만나 함께 복음을 전하려고 했지만, 디도를
만나지 못했는데, 자신의 심령 속의 성령께서 편하지 못하여, 그들을
작별하고 디도를 만나기 위해 마게도니야로 갔다. 아마도 바울이 디도와의 관계가 복음사역을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바울은 디도에게 거짓교사들의 거짓된 가르침을 바로잡고, 신도들에게 바른 말씀으로 교훈하고 가르치라고 말했다. 주님을 믿기
전에는 그는 모두가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사단에게 속았었고,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 했으며,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가증스러운 자였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간 이후로는 이런 사람이 아니라 변화된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다. 사단에게 속아서
죄의 노예가 되어 사단에게 종노릇 하는 불쌍한 인생을 살다가 이제 사단의 종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그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는 디도에게 거짓의 사람들,
즉 이단에 빠진 자들과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고 말한다. 거짓의
사람들은 거짓의 영, 즉 사단에 사로잡힌 자들이다. 거짓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설명한다고 자신의 잘못을 깨달을 수 없다. 거짓의 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자들에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가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성경의 말씀대로 말하지 않는다면, 그곳은 교회가 아니라 이단 집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통해 구원받은 존재이기에, 그에 걸맞은 삶, 즉 날마다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한 것을 확인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날마다 죽노라』를 고백했다. 우리
옛사람(육의 몸)이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이 곧 하나님께 대하여는
거룩함이요, 세상에 대해서는 빛이 되며, 부활생명이 되는
것이다. 그 빛이 죽어있는 영을 살리는 것이다. 이게 하나님의
선을 실천하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2장 14-15절에서『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오스멘)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라고 말한다. 오스멘은 향기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그리스도를 받아드리지 못하는 자에게는 죽음에서 죽음으로 이르게 하는 냄새가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있는 자는 생명에서 생명으로 이르게 하는 향기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가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려지는 삶을 의미한다. 이 삶은 날마다 죽고
날마다 부활한 것을 믿는 삶이다. 말로만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신실함에서 하나님으로 부터 난 자 같이 하라는 것이다. 이는 심령 속의 성령이 인도하시는 가운데 사는 삶이 된다. 율법에서
벗어나고, 세상에서 벗어나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향기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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