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로마서 1장 18-20절『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카테콘톤) 사람(안드로폰 톤)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파산 아세베이안)과 불의(아디키안)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아포칼륍데타이)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토 그노스톤 투 데우) 그들 속에 보임(파네론)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에파네로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토이스 포이에마신)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아디키안 안드로폰(ἀδικίαν ἀνθρώπων)은 그 사람들의 불의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 사람들의 불의 때문이다. 그 사람은 로마교회의 신자들처럼 예수를 주로 영접하고 성령체험까지 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행하는 불의를 의미한다.
파산 아세베이안 카이 아디키안은 모든 불신앙과 불의다. 카테콘톤(κατεχόντων)의 기본형은 카테코이다. 카테(강세형 접두어)와 에코(갖고있다)의 합성어로서 (무엇을) 꽉 붙잡다, 고수하다 라는 의미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의 진리를 당연히 고수해야 하는데, 그러나 복음의 진리를 불의 안에서 고수할 때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아포칼륍데타이(Ἀποκαλύπτεται)는 계시되어지다 라는 의미다. 숨겨져 있던 하나님의 진노가 드러나고 있다는 의미다.
토 그노스톤 투 데우(τὸ γνωστὸν τοῦ θεοῦ)는 하나님의 그 알려진 것이라는 의미다. 하나님이 자신을 그 사람들 안에 명백히 나타내 보이셨다는 것이다.
기노스톤(γνωστὸν)는 체험적으로 관계를 통해서 알다(히브리어 야다와 같은 개념)는 의미다.
파네론(φανερόν)과 에파네로센(ἐφανέρωσεν)의 기본형은 파네로스인데, 빛을 비추어서 무엇인가를 밝히 보이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기독교의 문제는 예수님이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지식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 체험적으로 심령 속에 임재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성경 속에서만 하나님을 찾기 때문이다. 말씀이신 호 로고스는 심령 속에 임재하시며, 성경 속에서는 하나님은 레마로 역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레마를 통해서 성령 감동을 받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직통계시를 통하지 않고, 성경 속에서 말씀을 읽고 성령의 감동으로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깨달음의 종교가 아니라, 호 로고스와 직접 대화하는 종교인 것이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조직신학에서는 이 귀절을 두고 하나님의 자연계시라고 말을 한다. 그러나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자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애니미즘에 빠질 수 있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토이스 포이에마신(τοῖς ποιήμασιν)은 만든 것들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만든 인간에 대한 언급이다. 창조 이후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그들 안에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게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분명히 볼 수 있게 하셨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자들은 태어날때부터 그 안에 사탄이 주인이 되어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자가 흙속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믿음으로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사탄으로부터 자유인이 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들 중에 자기 안에 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할 때가 있다.
로마서 1장 21-23절『하나님을 알되(티오티 그논테스 톤 데온)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에위카리스테산)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에마타이오데산 엔 토이스 디알로기스모이스ἐματαιώθησαν ἐν τοῖς διαλογισμοῖς )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파스콘테스 에이나이 소포이 에모란데산)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티오티 그논테스 톤 데온(διότι γνόντες τὸν θεὸν)에서 그논테스는 기본형인 기노마이에서 유래된 것으로, 하나님을 알되 체험적 관계를 통해서 아는 것을 의미한다. 아오리스트 시제를 사용한 것으로서, 이들이 성령세례를 받고 하나님을 알게된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한 존재들을 말한다. 에위카리스테산(ηὐχαρίστησαν)은 아오리스트 시제, 수동태로서 마음 속의 깊은 곳에서 순간적으로 올라오는 감사를 의미한다. 디알로기스모이스(διαλογισμοῖς)는 인간의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호 로고스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로 부터 온 생각이다. 성령의 사람은 자신의 생각으로 살지 않고 말씀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온 생각으로 산다.
파스콘테스 에이나이 소포이 에모란데산(φάσκοντες εἶναι σοφοὶ ἐμωράνθησαν)은 그들은 지혜가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어리섞게 되었다 라는 의미다.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면 이렇게 된다. 그러한 자들의 어리섞음은 우상숭배로 연결된다.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보이는 형상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짓는 가장 큰 죄는 성전된 자신의 몸을 더럽히는 것이다. 심령 속에 호 로고스가 임재해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 분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욕망, 탐욕이라는 우상때문이다. 인간의 탐심에서 나오는 우상숭배의 무서운 결과로서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마치 출애굽하여 시내산에서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올라갔을 때, 늦게 내려오므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경배한 사실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다고 믿지만 그 분과 관계를 맺으려고 시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신 호 로고스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성도 안에 계시는 이유는 성도와 말씀의 관계를 맺기 위함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분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말씀의 관계를 맺으려고 하지도 않는 것이다.
호 로고스와의 관계가 없는 자는 말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만, 세상의 욕심대로 사는 자들이다. 세상을 위해 사는 자들은 사실상 하나님과의 단절인 것이다. 바울은 에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에게 세상 죄를 짓고 있음을 고발하는 것이다. 하나님도 믿고 세상의 욕심도 따르는 자들이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바울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정죄함이 아니라, 죄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죽고 하늘로부터 다시 태어나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세례를 받고 죄로부터 벗어나라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잘못된 신앙에 빠져있는데, 이를 경고하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 확신도 문제인 것이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구원의 확신을 아무리 외쳐받자 소용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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