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야고보서 2장 22-24절『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과 아브라함의 믿음과 같다는 말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떤 행위로 얻어지는 결과의 믿음이 아니라,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인 것이다. 하나님이 구십구세에 내년에 아들을 주겠다고 했을 때, 속으로 웃었다. 자신이 육적 나이를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백세가 되어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깨닫게 되고 이를 믿게 되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백세에 도저히 이를 수 없는 아들을 얻는 믿음이다. 그래서 얻은 아들이 이삭이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믿음은 단지 믿음 자체 만으로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결국 행동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야고보는 기생 라합의 예를 든다. 야고보서 2장 25절『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야고보가 기생 라합을 비유로 들은 것은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과 동일 선상에 놓고 보는 것이다. 기생 라합이 행한 일은 가나안 사람들에게 대하여, 죽음을 각오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라합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행한 것이 바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운 것이다. 믿음이 행동으로 연결된 것이다.
야고보는『영혼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라고 믿음과 행함에 대해서 추가하여 정리한다. 행함이 없는 것은 영을 살리지 않는 사역이며, 이 사역이 없는 믿음은 역시 영적으로 죽은 믿음이라는 것이다. 즉 호로고스의 믿음이 아니라 자기가 믿는 믿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초대교회 당시에 제자들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을 하므로, 유대교에서 전환하여 예수를 믿는 자들이 교회 공동체로 들어왔는데, 율법도 행해야 한다는 율법주의자들로 인해서 혼란이 일어났다. 심지어 사도바울은 회심하여 로마로 가서 전도를 할 때 유대주의자들이 바울을 비난할 때, 이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머리를 미는 행동까지 하면서 이들과 연합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했으면, 그것이 행동으로 나와야 하는데, 교회 공동체 사람들은 율법주의를 그것에 섞는 것이다. 믿음과 율법이 혼합된 이른바 영적 간음을 저지르고 있다는 말씀이다. 그러면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을 나타내는 믿음은 무엇인가?
야고보서 2장 14절에서『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능히 할 수 없다.』라고 했는데, 대부분 교회 사람들은 믿음과 행함에 대해서 믿음은 예수를 믿는 것, 행함은 교회 밖에서 어떤 도덕적인 것을 행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믿음과 행함의 의미는 믿음있는 교역자가 사역(영을 살리는 것)하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은 믿음이 나타나는 행위(예배, 기도, 교회생활 등)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호로고스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심령에 들어와 역사하는 것을 완전하게 믿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교역자가 사역을 위해 믿음을 가지는데, 믿음없이 (예수 그리스도가 심령에 없는 것처럼) 사역한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라는 것이다. 영을 살려야 하는데, 세상의 인본주의, 율법주의, 영지주의적인 사역을 한다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역자는 주의 말씀을 심령 가운데 듣고, 그 믿음 가운데서 사역을 해야한다는 말이다.
초대교회 당시에도 영지주의가 만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라고 했을 때, 그 예수를 믿는 믿음은 대부분 지식으로 예수를 아는 믿음이다. 그래서 아는 지식으로 예수를 믿는다 라고 말만하면, 칭의를 얻는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 십자가에서 죽었는데, 그를 믿기만 하면 믿는 자도 모든 죄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호로고스가 심령에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지식적으로 믿는 이러한 것들영지주의의 한 분파가 되는 것이다.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라고 번역된 것의 원어는 메티나타이 헤 피스티스 소사이 아우톤(μὴ δύναται ἡ πίστις σῶσαι αὐτόν) 『메(없다) 티나타이(능히 할 수) 헤(그) 피스티스(믿음이) 소사이(구원하는 것을) 아우톤(그들)』이다. 그 믿음이 그들을 능히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호로고스가 없는 믿음은 그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2장 14절에서 야고보가 교역자에게 말하는 핵심은 두가지다. 사역을 위해 호로고스의 믿음을 가져야 하는데, 호로고스가 없는 믿음으로 무슨 사역을 하겠는가 라는 것이고, 호로고스가 없는 믿음은 자기를 구원하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호로고스가 있는 믿음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옛사람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사람으로 부활한 것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이 그의 심령 속에 호로고스로 들어와 임재하신다는 말씀이다. 이게 성령세례인 것이다. 그리스도가 호로고스로 들어오지 않으면 믿는다는 말은 행위가 없는 믿음이라는 말씀이다.
야고보는 2장 15-17절에서 말한다.『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이 비유는 비록 세상에 있는 육신의 형제도 양식이 부족하면 도와주는데, 영적으로 교회 안의 형제들 간에 호로고스의 믿음과 영을 살리는 일에 관심없다면,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라는 것이다. 행함(사역)은 영을 살리는 일이다. 하나님의 뜻은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 처럼 죽었던 영을 살리는 일이다.
야고보서 2장 18절에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피스틴)이 있고 나는 행함(에르가)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에르가(ἔργα)는 사역(영을 살리는 일)이다. 피스틴(πίστιν)은 호로고스(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심령에 있는 믿음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호고스가 없는 믿음이다. 즉 예수를 믿지만,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는 믿음을 의미한다. 야고보는 행함으로 나오지 않는 그 믿음을 나에게 보여봐라는 것이다. 『나는 행함으로 나오는 그 믿음을 네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결국 어떤 믿음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영을 살리는 사역은 호로고스가 있는 믿음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이 믿음없이는 영을 살릴 수 없다는 말이다. 우리 말 번역에는 믿음과 행위를 분리된 것처럼 했는데, 호로고스의 믿음과 행위(사역)는 분리된 것이 아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새생명으로 부활하였음을 믿는 것이고, 행함은 성도의 심령 속에 새성전(새사람)에 호로고스가 임재하여 그 분과 더불어 살아가는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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