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베드로전서 1장 16절『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레위기 19장 2절『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거룩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삶이다. 죄인이 희생제물을 죽이고 피를 제단에 뿌리고, 살을 태우는 행위는 죄인이 이렇게 죽었다는 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자기를 불 태우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희생양이신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거룩하게 인정해 주신다. 그래서 거룩한 자는 세상에 대해서 죽은 자요, 세상과 구별되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거룩하게 되어지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1장 16절을 헬라어 성경으로 보면, 스테파누스 헬라어 성경은 διοτι γεγραπται αγιοι γενεσθε οτι εγω αγιος ειμι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이니 너희들은 거룩으로 태어날지니라』라고 번역되며, 넷슬 알란드 헬라어 성경은 διότι γέγραπται · ἅγιοι ἔσεσθε, ὅτι ἐγὼ ἅγιος.『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이 될지니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거룩이신데, 거룩하다 라는 표현을 한다. 이는 하나님의 상태를 표현하는 것으로, 하나님은 그 자체가 거룩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모두 거룩인 것이다. 거룩은 성결 또는 성화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이 거룩은 예수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것을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따라서 거룩은 부활생명을 가진 자라는 것을 말해준다.
교회 공동체 사람들은 거룩, 성결, 성화를 영적 성장과 대단히 혼동하고 있다. 영적 성장은 신도들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삶의 태도가 점차 변화되어 가는 것을 의미하지만, 거룩과 성결, 성화는 사람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거룩을 마치 인간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것처럼 잘못번역된 곳이 있다.
베드로후서 1장 4절『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약속은 에팡켈미타(ἐπαγγέλματα)로서, 하나님 나라를 상속으로 주시려는 약속이다.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데이아스(신) 코이노노이(참여하다) 퓌세오스(본성) θείας κοινωνοὶ φύσεως) 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본성(신성)에 참여하는 것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신의 성품은 마치 인격적 의미를 나타내지만, 신성은 하나님의 능력 그 자체이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면 성도가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성품은 변하는 모습이지만, 신성은 절대 변하지 않는 모습이다. 그래서 교회 목사들 중에는 신의 성품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연결해서 말하는 이들도 있다. 신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데, 그들은 신의 성품(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베드로후서 1장 5-7절『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스푸데)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스푸데(σπουδὴν)는 열망으로서, 신성에 참여하는 열망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여덟가지 덕목이 등장하는데, 마치 단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처럼 되어 있으나, 헬라어 성경을 보면, 믿음 안에 덕이 있고(ἐν τῇ πίστει ὑμῶν τὴν ἀρετήν), 덕 안에 지식이 있고(ἐν δὲ τῇ ἀρετῇ τὴν γνῶσιν), 지식 안에 절제가 있으며(ἐν δὲ τῇ γνώσει τὴν ἐγκράτειαν), 절제 안에 인내가 있고(ἐν δὲ τῇ ἐγκρατείᾳ τὴν ὑπομονήν), 인내 안에 경건이 있고(ἐν δὲ τῇ ὑπομονῇ τὴν εὐσέβειαν), 경건 안에 형제 우애가 있으며(ἐν δὲ τῇ εὐσεβείᾳ τὴν φιλαδελφίαν), 형제 우애 안에 사랑이 있다(ἐν δὲ τῇ φιλαδελφίᾳ τὴν ἀγάπην)는 말이다.
우리말 번역에서,『더하라』는 말이 『노력하라:make every effort to add』는 말로 영어성경(niv)에는 번역되었다. 물론 킹제임스 번역은『주어진다(giving)』로 되어있으며, 헬라어 성경에는παρεισενέγκαντες(파레이세넨칸테스:적용하다) ἐπιχορηγήσατε(에피코레게사테:주다)』(여덟가지 덕목이) 주어지고 적용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부활생명으로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신성이 이 같은 모습으로 주어진다고 말을 하는 것이다. 믿음을 통해서 덕(탁월함)이 생겨나고, 지식(하나님과의 하나되는 관계)을 통하여 은사를 받게되고, 그래서 사람이 교만해질 수 있다. 그것을 깨닫는 자는 절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내(휘포모네)로 연결된다. 휘포모네는 주님의 보좌에 머무는 것이다. 그래서 경건(유세베이안: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형제사랑과 아가페 사랑이 이루어진다. 부활생명을 받은 자는 이웃의 영을 살리기 위한 이런 마음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상당 부분 영적 성장에 대해서 표현하고 있다. 그 이유는 성도 자신이 거듭났다고 믿는데, 전도 대상이 바라볼 때, 자기들 보다 못한 삶을 산다면 누가 복음을 믿겠는가 라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육체적 성장 뿐만 아니라 정신적 성장을 바라는 것이 상식적이다. 부모로부터 교육을 받고 잘 성장하면, 어릴 때는 미숙하지만 점차 자라면서 성인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게된다. 영적 성장도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가정이나 사회에서 성경 말씀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태도는 점차 영적 성장을 가져오게 한다. 그러나 이것이 거룩이나 성결이나 성화와는 다른 개념이라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에서 목사들이 그리스도인 답게 삶을 삽시다 라는 것은 영적 성장을 말하는 것이지, 거룩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목사들이 거룩에 참여하는 의미로 말을 한다면 거룩과 영적 성장을 구분하지 못한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한다는 말도 마치 하나님의 형상이 하나님의 거룩한 신성을 의미하는 것처럼 생각해서 그런 말을 하겠지만,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이 죄인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대속하기 위해 형상으로 나타났는데, 신도들은 그런 하나님의 형상을 신적인 형상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영지주의자들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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