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바울이 로마서에서 세례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로마서는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다. 사도바울의 서신은 일곱개이다. 성령세례에 대해서 쓴 것은 없고,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말은 에베소서에 언급되고, 모든 서신에는 물 세례에 대해서 설명한다. 물세례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교회는 성령세례를 구한다. 대부분의 교회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데, 삶의 현장에서 능력이 없으므로 구하는 것이 성령세례이다. 이것이 바로 미혹의 시작인 것이다.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은 성령의 능력이 아니라 자아의 죽음이다. 우리의 모든 문제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죽지 않아서 문제인 것이다. 십자가의 감격이 없기 때문에 성령의 능력을 구하는 것이다.
백년 전까지 그리스도인들은『십자가는 완성된 사랑이지만 성령의 역사는 죽을 때까지 완성되지 않는다』라고 가르쳐왔다. 사탄의 머리는 성령을 따를 때 쪼개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친히 십자가에서 뱀의 머리를 부숴버린 것이다. 사탄이 두려워하는 것은 십자가이다. 십자가의 감격이 없으므로 성령의 능력만을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요한계시록처럼 죽임당한 어린양 만을 노래해야 한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활의 능력을 구한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라고 말하기도 한다. 십자가를 구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회개하지 않은 증거이기도 하다. 부활을 믿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된다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리신 것 처럼 부활 생명을 주시는 것이다. 부활의 능력을 외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외쳐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문제는 자아의 죽음이 없기 때문이다. 삶의 어려움이 오면 내 자아의 뜻대로 하는 것을 보게된다. 삶의 어려움이 오면 성경을 보지도 않고 내 뜻을 먼저 생각한다. 이게 회개하지 않은 증거이기도 하다.
『죽었다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나에 대해서 죽은 것을 말한다.『죽었다는 것』주님 만을 따르는 것이다.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바울은『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하면서 죄로 죽었던 것을 말한다. 그러나 로마서 6장 2절의『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는 서로 다른 의미이다. 예수로 인하여 살리심을 받지 않으면 에베소서 2장 1절과 같은 상태라는 말이다. 회개하지 않은 자는 자기가 주인이다. 자기가 주인인 사람은 허물과 죄로 영이 죽어있는 자라는 말이다. 내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절대 못받아드리는 것이다. 자기가 신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믿기 때문에 예수께로 왔지만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신다.『너희가 내 말 안에 거하면 참 나의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듣고 있는 자들은 기분이 상했다.『우리가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왜 자유하라 하느냐』그러니까 예수님이『죄를 지은 자는 죄의 종이니라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본 것을 행하고 따르며, 나는 나의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행하고 따른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들이『우리 아버지는 한 분 뿐이시니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라고 말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 아버지는 마귀니라』라고 하셨다. 그리고『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도다』라고 하신 것이다. 오늘날 교회 사람들이 예수믿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철저히 자기가 주인이라면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의 기분에 따라서 믿음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자기가 생각할 때 맞으면 하고, 틀리면 하지 않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자기가 신인 것이다. 자기가 살아있는 것이다. 다만 교회 일을 열심히 할 뿐이다. 열심히 하는 것이 순종은 아닌 것이다. 이런 자는 『주여 주여』하면서 가끔 성령 체험도 한다. 회개하지 않으면 허물과 죄로 죽어있는 자이다. 회개는 자아가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예수의 십자가와 연합되는 것을 말한다. 자아가 죽는 것을 말한다.
에베소서 2장 2절에서『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불순종의 자녀는 바로 죽어있는 자들이다. 예수와 함께 죽지 않은 자들은 에베소서 2장 3절에서 말하는 자들이다.『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하나님이 진노하고 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고 말하고 있으며『예수를 영접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을 하고 있다. 진노의 자식들은 영은 죽어있지만 혼이 성실하게 활동하고 있는 자들이다. 주님은 혼의 역사를 절대 받지 않는다. 혼은 예수와 함께 죽어야 한다. 그래야 영이 살아나는 것이다. 이게 거듭남의 비밀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들어갈 수 없다. 거듭난 자만이 영접할 수 있다. 요한복음1 장 12-13절에서 말하고 있다.『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부터 난 자들이니라』그런데 오늘날에는 거듭남의 비밀도 모르는 자에게 교회만 오면 영접기도를 하게 한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거듭난 영이 영접할 수 있다. 거듭난 영에게 그리스도가 들어오시는 것이다. 인간의 혼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 죽은 예수와 연합될 때 그 때가 거듭난다는 말이다.
진리를 내가 들고 있을 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진리가 내 인생을 붙잡을 때, 즉 주인이『나』에서『진리(예수)』로 바뀔 때 거듭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이 바로 세례이다. 세례가 거듭남이다. 우리의 모든 문제는 내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 난 자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아브라함의 예로 하나님께로 부터 난 자는 바로 이삭이라는 말이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사도바울도 다메섹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 후 삼일 동안 모든 것이 바뀌게 된다. 삼일 뒤에 주님이 아나니아를 보냈다.『사울아 왜 주저하느냐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라고 했다. 사도바울의 죄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된 후에 씻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영이 죽어있는 자가 어떻게 인격적으로 예수를 만날 수 있겠는가? 혼이 죽어야만 가능하다. 회개해야 혼이 죽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되는 회개가 있어야 영이 살아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주체는 혼이며, 혼의 주인은 마귀인 것이다. 혼이 죽을 때 영이 살아나는 것이다. 구원은 주인이 바뀌는 것이다. 마귀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로 바뀐다. 그리고 나의 정체성도 혼에서 영으로 바뀌게 된다. 혼은 마귀를 주인으로 모시지만 영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다. 나의 자아가 바로 혼인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셨는데, 아브라함은 친척인 롯을 데리고 나오게 된다. 회개하지 않은 인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도 내 뜻대로 한다. 문제가 발생하는데, 이로 인해 결국 롯과 결별하게 된다. 주님이 기회를 주신 것이다. 롯에게 다 빼앗기게 된다. 그 다음에 아브라함이『나의 상속자는 고향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라고 말한다. 아브라함 자기가 정해버리는 것이다. 이 때 하나님은『아니다』라고 하시면서 계약을 하자고 하신다. 『재물을 쪼개라』라고 하셨더니 아브라함이 재물을 쪼갰다. 그리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재물을 태우고 하나님이 약속을 하신다.『내가 너에게 자녀를 주겠다』이렇게 주님을 체험하면서 아브라함이 11년간 하나님을 따랐던 것이다. 그런데 11년이 지난 86세때 사래가 아브라함에게『나의 여종 하갈을 취하라 그래서 자녀를 낳자』라고 했는데, 그 말을 받아드렸다. 아브라함이 하갈을 취해서 이스마엘을 낳게된다. 아브라함이 이 때까지 멜기세덱을 만나고 예배가운데 불이 내려오는 신비한 체험을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의인이라 칭함을 받지 못했다. 결국 이스마엘을 낳은 것이다. 혈통이 된 것이다. 주님이 86세부터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았다. 로마서 4장 18절에서『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9-22절에서는『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바로 이런 믿음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라는 말씀이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4장 23-24절에서『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이 믿음에 이르면 구원받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으로 부터 의로우심을 얻기 때문이다. 이 믿음이 바로 회개한 후에 오는 믿음이라는 말이다. 이런 회개의 믿음이 아브라함에게는 이삭을 낳은 100세가 되어서야 얻게된 것이다. 이 때 비로소 이스마엘을 내어 쫓아야 하는 것을 알게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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