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확신과 구원받는 믿음

자기 확신과 구원받는 믿음

 예수님이 삼년 동안 베드로와 함께 하셨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본 첫날부터 기적의 연속이었다. 베드로도 처음 본 기적이 장모의 열병 치료였다. 삼년 동안 인간으로서 가장 많은 기적을 체험했다. 한번은 예수님이 질문을 했다.『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베드로가 말하기를 『당신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이십니다.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구원자 메시야』라고 대답했다. 베드로는 삼년 동안 의심한 적이 없었다. 기적을 경험할 수록 더 믿어졌다. 삼년 동안 믿음이 자랐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가복음 22장 31-32절에서『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라고 하신 것이다. 베드로가 기적을 많이 보고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님으로 부터 들어왔는데도 사탄이 그를 넘어 뜨릴려고 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믿음이 떨어질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 놀라운 기적들을 보고 예수님 앞에서 하나님 말씀을 직접 듣고 배웠던 베드로가 사탄이 넘어뜨릴 수 있다면 오늘날의 우리들은 어떤가? 베드로가 안되는데 우리가 어떻게 되겠는가? 그리고 예수님이『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베드로가 돌이킨 후에야 교회를 세울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베드로는『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라고 대답했다. 대단한 믿음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라고 하셨다. 마태복음에는 베드로의 대답이 있다.『아닙니다. 나는 결코 부인하지 않습니다. 나는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결코 부인하지 않습니다』라고 하니까 예수님은 더 이상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곧 후에 로마군병들에 의해서 잡혀가게 되었다. 그 밤은 매우 추웠고, 예수님은 그 날밤에 고문을 당하게 되는데, 군병들이 눈을 가리고 침을 뱉고 때렸다.『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누가 쳤는지 말해보라』라고 조롱한다. 밤새 매맞고 조롱을 당하셨다. 그런데 베드로는 추위를 느꼈다. 그리고 추워서 불을 쬐러 나갔다. 그 때 불쬐는 곳에서 세 사람이 말하는 것이다.『너는 예수와 함께 있던 자다』 한 시간 뒤에는 더 정확하게 말했다.『너 어제 밤에 내 친척을 칼로 베었잖아』그런데 베드로가 부인했다.『난 예수를 몰라』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세번 부인했을 때 닭이 울었다. 그제서야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삼년 동안 초자연적인 기적을 보고 성경의 말씀을 듣고 배웠지만, 자아는 거짓말도 못이기는 것이다. 어제 밤에는 예수님과 함께 감옥에도 가고 죽을 것도 각오했는데, 안되는 것이다. 거짓말이 나오는 것이다. 베드로의 절망을 알아야 한다. 베드로의 절망이 바로 우리들의 절망이기도 하다. 베드로는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하는 천국의 광경도 보았는데 거짓말하는 죄를 못이기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전적 타락이다. 우리의 힘으로 순수이성 비판을 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과학은 발달하지만 도덕은 타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의 과학문명에도 자살율이 점증하고 있는 현실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는데, 인간은 하나님을 잊어버렸고, 사단의 권세 아래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어두움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없는 모든 인간에게는 어두움이 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판단을 성경은 알 수 없는 것이다. 과학과는 다른 것이다.
하나님은 큰 심판을 노아때 했는데, 이후 노아의 방주가 발견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하나님은 노아를 의인으로 말씀하셨고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한다. 우리가 인생을 사는 동안에 우리의 목표가 의인이 되기를 바래야 한다. 우리의 목표가 성공과 행복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천국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바라는 인간의 목표는 의인이다. 주님은 노아가 의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노아야 120년 동안 전해라 120년 뒤에는 내가 물로 심판한다』그래서 노아는『다 죽는다』라고 전했던 것이다. 노아의 뉴스는 무시무시했다. 심판이었기 때문이다. 노아의 아버지는 노아의 동생들을 700년 동안 낳았다. 그런데 큰 형 노아가 받은 하나님의 말씀, 즉 120년이 지나면 물로 심판한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무도 몰랐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지나 지성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예수믿으세요 예수믿으면 구원받아요』이 말은 너무 건너뛴 것이다.
구약시대 하나님이 율법의 말씀(토라)를 주셨고 성전도 주셨는데,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예배를 드리는데, 그런데도 그들은 범죄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에 끌려가도록 해서 심판하도록 했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이킬 수 있도록 선지자들을 보내셨는데, 선지자들을 환영한 자들은 없었다. 그들은 성경과 예배가 있었지만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분별하지 못했다. 다 돌로 쳐 죽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성경을 가지고 성전에서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던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마저 죽였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성경의 선언이다. 우리 힘으로는 하나님이 보내시는 구원의 길을 알 수 없는 것이다. 마지막 때는 노아의 때와 달리 불로 심판한다고 약속하셨다. 노아가 12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성경은 그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 자세히 말하지는 않는다. 단지『생각하는 바가 어렸을 때 부터 악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노아의 말을 거절했다. 하나님은 방주를 만들도록 지시했고 역청으로 안팎으로 칠하도록 했다. 방주 색이 검게 변했다. 그 당시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웠겠는가, 그런데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 아름다운 세상을 두고 컴컴한 방주에 들어갈 자가 누가 있었겠는가? 죄인인 인간이 방주가 구원의 배라는 것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적타락 때문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번 부인하고서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전적타락의 깨달음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잘 인용하고 있다.『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노아의 시대에 이 말씀을 전한다면『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방주를 주셨으니』라고 느꼈을까? 아니면『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렇게 아름다운 지구를 주셨으니』라고 느꼈을까? 노아와 가족 8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사랑한 것이 방주가 아니라 아름다운 이 세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이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 안에서는 구원의 계시가 없다. 심판의 메시지를 받은 사람 만이 저 방주가 사랑으로 보이는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는 두 종류가 있다. 성공과 행복이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교회와 방주 만이 하나님의 사랑이 계시되었다고 느끼는 교회이다. 전자는 하나님이 인간을 진노하고 있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심판하신다. 하나님의 심판은 세상의 모든 심판 보다 무서운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의롭기 때문이다. 노아가 외친 것은 바로 사랑이 아니라 의를 외친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의다. 의를 얻는 자만이 방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의가 없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방주가 아니라 이 아름다운 자연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의롭기 때문에 불로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깨닫는 자만이 방주가 사랑이구나 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방주는 무엇인가? 십자가일 것이다. 방주에 들어가는 자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연합되는 자이다. 오늘날 교회가 성공과 행복을 통해서 사랑을 느끼는 하나님이 아니라 방주를 통해서 심판하시는 의의 하나님을 느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불로 심판하신다. 이것을 인간의 힘으로 깨달을 수 있는 자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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