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요한복음 6장 60절에서『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라고 제자들이 말했다. 이렇게 말하기 전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55-57절에서『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하셨는데, 제자들이 어렵다고 한 것이다. 왜냐하면 구약성경 전체에서 짐승의 피를 마시면 안 되도록 되어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따르는데,『내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수군거리는데, 예수님이 63절에서 다시 말씀하셨다.『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사람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받아드리기 어려웠다.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는데, 예수님은 구약성경을 잘 알고 있는 니고데모에게『다시 태어나야만 한다』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을 했을까? 오늘날도『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라는 등의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을 했더라도 예수를 따르는 자가 있고, 어렵기 때문에 따르지 않는 자가 있다. 그냥 어려운 말은 제쳐두고 자신이 믿기 쉬운 말을 선택해서 구원에 이르고 싶은 것이다. 예수님은 65절에서 다시 말씀하신다.『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사람들은 요한복음의 이 말씀보다 마태복음의『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는 말씀에 익숙하다. 요한복음과 마태복음 두 가지가 왜 서로 차이가 있는가? 마태복음은 교회다니는 사람들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마태복음은 우리가 주님께 가려고 선택만 하면 우리는 주님이 쉬게 하시는 줄로 믿는다. 그러나 65절의 말씀에는 쉽게 다가가지 못한다. 그리고 또 사람들은『내가 노력할 필요가 없겠네』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주님이 이끈 사람은 자연스럽게 올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66절에서『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사람들이 떠나가는데, 왜 이렇게 예수님이 말씀을 하셨을까?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실 것인데, 떠나갈 줄을 아시면서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이후에 베드로와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노력하기 전에 주님의 긍휼을 항상 바랄 뿐이다.『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온다. 주님의 긍휼을 바라지 않고 열심히 힘쓰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율법 아래 있는 자이다. 이 사람들은 예수를 믿었지만 예수를 떠나갔다. 롯의 처 처럼 하나님을 믿고 따르다가 우리가 하나님을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롯의 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해야만 한다.
마태복음에서 왕이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를 준비했는데,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한다. 오늘날 현실적인 상황에 이 이야기를 대입하면 현실에 맞지 않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예수님 십자가 사건에 해당된다. 사람들이 오지 않으므로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부르라고 하셨다. 그래서 잔치에 사람들이 와서 왕이 말하는 것이다.『결혼식에 맞는 예복을 입지 않은 자의 손과 발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던져라』라고 했다. 그리고『청함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택함을 입은 사람은 적으니라』잔치에 가도 끄집어낼 사람이 훨씬 많다는 말이다. 청함을 입은 자와 택함을 입은 사람이 동일하지 않다. 그런데 오늘날 신앙 생활을 하는 자는 어느 말을 더 붙잡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인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만 한다. 주님께서 이끌지 않으면 예수께로 나아올 자가 없다. 문제는 예수께로 나아왔으니 주님이 이끌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구원은 내가 확신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인정해 주셔야만 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대개 교회 사람들은 성경에서 하신 약속의 말씀을 붙잡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요한복음 8장 30-32절에서『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사람들이 기분이 안 좋았다.『우리는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는데, 왜 우리더러 자유케 되라고 하는가?』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34절에서『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예수님의 말씀은『너희가 나를 믿는다고? 너희는 죄의 종이잖아』라는 말씀이다. 6장에서는 예수님을 따랐는데,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에 떠나갔다. 그런데 8장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지만 예수님은 죄의 종이 된 것을 지적하고 있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로 하였지만 주님은『너희들 죄의 종이잖아』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죄로 부터 자유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요한복음 8장 36절에서『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아들이 자유케한다. 그래야 그 집에 들어갈 수 있다. 35절에서『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종은 집에 있지만 영원히 있을 수 없다. 결국 쫒겨난다. 그런데 37절에서『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예수믿는 자들인데, 예수님이『나를 죽이려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오늘날에 교회에 앉아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예수님이『너희가 나를 죽이려고 하는구나』라고 한다면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우리가 언제?』라고 펄쩍 뛸 것이다. 어두움 속에 있는 자들은 이 말씀의 의도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믿는다고 나선 사람들이 사실은 사단에게 붙잡혀 어두움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을 모르고 있다.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은 육신이고 죄의 종인데도 불구하고,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것도 모르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 7장 19절에『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그랬더니 20절에서 사람들이『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라고 말했다. 주님의 말씀과 듣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이 사람들이 오늘날 많은 교회 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면 아마 미쳤다고 할 것이다. 예수님을 보고 귀신들렸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당신은 글을 배운 적도 없는데, 어떻게 글을 아느냐』라고 물었다. 관심을 가지고 예수와 대화했는데, 결국 이렇게 예수님을 귀신들린 자라고 말한 것이다. 예수님을 귀신들렸다고 하는 자는 사실 자기들이 귀신들린 것이다. 육신에 있는 사람은 내가 살기 위해서 남도 죽이고, 예수도 죽이는 존재다. 왜냐하면 그 속의 주인은 마귀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건 안 믿건 관계없이 예수와 연합되지 않은 모든 사람은 그 아버지가 마귀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와 연합된 자가 아니다. 요한1서 2장 15절에서『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성경에서 이렇게 분명히 말하고 있는데도, 마음 한 가운데서 웃으면서『어떻게 다 그렇게 살 수 있는가요』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예수를 죽이려는 자인가 아니면 예수와 연합된 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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