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

유다서 1장 3절에서『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유다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편지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으로 받은 구원은 common salvation 이라고 한다. Common 이라는 말은 사도행전에『제 것이라 하는 이가 없고, 모든 사람이 함께 서로 물건을 통용한다』는 말이 있다. 말하자면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구원을 말한다. 구원이 우편 강도처럼 쉬워 보이는 것도 아니고 빌립보 간수처럼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십자가 상의 위기 상황이나 언제 어디서나 구원은 동일하다. 성경에서 어떤 경우는 구원이 쉬워 보이지만 구원을 모르는 것이다.  common salvation 에 대하여 편지를 쓰는 이유가 성도에게 단 번에 전달된 믿음을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이런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다.
이 시대 많은 교회는 내가 예수를 안믿다가 들어보니 설득이 되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맞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이 보내신 자 의로우신 자의 피 외에는 우리 죄는 우리 선행으로 씻어지지 않는 것이 믿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맞는 말이다. 그래서 안믿다가 믿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그것을 회개로 착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말씀은 들어갈 곳이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단번에 전달된 믿음이라고 한다. 여기에다가 단번에 영원히 전달된 믿음이라고도 한다.『죄인인 우리가 진지하게 예수를 믿게되면 다 영원히 구원받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유다서는 그런 것이 구원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며『힘써 싸우라』고 말한다. 성도들에게 단번에 전달된 믿음은 무엇을 말하는가? 복음서에서는『믿기만 하라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 믿는 자는 주의 영광을 본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라고 하니까 제자들이『믿음을 더 하소서』라고 기도하였다. 근데 유다서는 단번에 주신 믿음을 위하여 힘써 싸우라고 했다.
1장 4절에서『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미리 받기로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라』판결을 미리 받기로 기록된 자는 정말 두려운 말이다. 성경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다. 영접기도, 우리가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말하는 것들이 바로 색욕거리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은혜를 색욕거리로 만들어버렸다. 이런 자들은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들이 아니다. 이런 자들은 가만히 기어들어온 자들이다. 주님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1장 5절에서『너희가 본래 범사를 알았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참 어려운 말씀이다.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했다는 말씀이다. 즉 죄로 부터의 구원은 영원하지 않다는 말씀이다. 3절부터 5절까지를 연결해 보면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는 출애굽 때의 갈렙처럼 요단강을 건너가 가나안 땅을 얻는 믿음이다. 그러나 이 믿음은 육신으로는 불가능하다. 열두지파 중의 열 정탐꾼은 모두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면 죽을거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육신이다. 육신은 절대 이 믿음을 받을 수 없다. 이게 아브라함의 99세 때 이야기와 같은 것이다. 그가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이스마엘을 낳았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사람을 회개하기 위하여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온갖 집회를 한다고 주님이 과연 역사할까? 이것이 색욕거리라는 말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는 주님이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색욕거리로 만들고 있다. 인기인을 동원하더라도 이 방법은 인간적인 방법이다. 왜냐하면 세상적인 사람들이『나 보다도 더 세상적인 사람들도 예수를 믿네』라고 말하면서『나도 믿어야지』하는 마음이 들게끔하는 심리학적인 이유를 내세워 온갖 집회를 행사하고 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주를 위해 사는 사람, 세상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으로 보이지만 주를 위해 사는 사람들을 통하여 믿음의 도가 전달되는 것이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많은 교회에서는 받았다고 선포한다. 이게 영적 간음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복음은 인기인들로 인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세상의 영향력이 있는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세상의 모든 부흥은 사람들이 거들떠 보지도 않는 사람들 몇 명이 모여서 기도할 때, 주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주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는다. 중심을 보신다. 주님은『너희가 알고 있지만 다시 생각나게 한다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광야에서는 영원한 구원은 없다. 빌립보교회에 쓰신 서신처럼『너희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를 생각하면서『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라고 하는 거짓된 소망을 버려야 한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만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그리고 13절에서『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우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먼저 우리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려는 것을 행하지도 않으면서,『우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는 말을 생각하면서 먼저 믿을 수는 없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는『우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이것부터 가르치고 있다. 듣고 좋아할만한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것을 먼저 가르치는 것이 색욕거리이다. 바울이『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라고 한 이 말을 먼저 말해야만 한다.
오늘날의 시대는 너무나 교묘하다. 탕자의 비유에서『누구든지 아버지께 돌아가야겠구나 깨달아져서 하랑방탕하게 살다가 아버지께로만 돌아가면 아버지가 받아주는 것이 구원이라』고 설명한다. 이게 먼저라면 성경 전체의 말씀과 다르게 된다. 왜냐하면 탕자의 비유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있지 않게되는 것이다. 들어갈 틈이 없다. 오직 아버지의 사랑 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미혹이다. 회개없는 믿음은 불법이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세가지의 비유가 있다. 먼저 잃어버린 어린양을 찾는 비유다. 예수 그리스도가 목자가 되어 잃어버린 어린양을 찾는다. 우리는 목자를 잃어버린 자들이라는 말이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사는 것이다. 우리가 행한 죄로 잃어버린 자가 된 것이다. 그래서 회개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두번째 비유는 잃어버린 동전이다. 동전은 움직이지 않고 죽어있다.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은 자라는 말이다.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은 욕망으로 하나님을 떠난 자라는 말이다. 회개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세번째의 탕자의 비유는 거듭나야 한다는 비유이다. 과거의 탕자는 죽은 것이다. 그런데 14장에서는 잔치를 준비했는데, 다 일치하여 사양했다. 인간은 하나님에게 돌아오는 자가 없다는 말을 하고 있다. 이것을 깨닫는 자만 돌아오게 된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니라』에서『이처럼 사랑하사』의 말씀이 바로 왕이 잔치를 벌이는 것과 같은 말씀이다. 주님이 니고데모에게『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을 받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이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면서 120년간 『의의 심판이 곧 있다 주님은 의인을 찾는다』 라고 외쳤다. 이처럼 사랑하사가 바로 방주를 짓게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처럼 사랑하사를 이 세상의 성공, 가정의 행복을 『이처럼 사랑하사』로 받아드리고 있지는 않은지? 그렇다면 이것이 색욕거리로 만드는 것이다.
이처럼은『모세가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장대에 매달려 죽은 못박하신 예수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누가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뱀에게 물린 자라는 것을 깨닫는 자다. 내 속에는 뱀의 독이 퍼져있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는 자만이 믿게 될 것이다. 컴컴한 방주에 누가 들어가는가? 내가 물로 심판받아 죽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이 믿어지는 사람 만이 들어갈 것이다. 회개없이 방주에 들어갈 자는 없다. 회개는『우리는 다 물에 빠져 죽어야만 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돌이키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는 자만이『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방주)를 주셨으니』가 되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과 연합되지 않는 구원은 없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죽어야 할 만큼 모든 인간은 타락한 존재인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진노하신다는 것을 깨달을 수 없을 정도로 타락했다는 말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죽어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길이 없는 것이다. 알 능력도 없다. 이게 문둥병이라고 한다. 인간은 죄로 도무지 하나님의 진노가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 외에는 하나님의 진노를 풀 길이 없다. 회개하고 같이 십자가에 죽어야 한다. 이럴 때『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사』가 적용된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회개하고 거듭난 자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회개하지 않은 자는 로마서 3장 19절에서『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가 적용된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혼과 영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하며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