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
디도서 1장 1-3절『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종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이렇게 된 것은 세가지를 위함이었는데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다. 노아가 방주를 지으면서 의의 말씀을 전파할 때『방주 바깥에는 다 심판을 받는다』라고 전했다. 방주 바깥에는 하나님의 의가 적용되고, 방주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적용된다. 십자가도 마찬가지다. 십자가는 하나님에게는 의가 되지만 사람들에게는 사랑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죽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랑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앞에 의가 반드시 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자기 아들이 제물로 처참하게 십자가에서 죽어야 될 만큼 주님의 의가 나타난 곳이다. 노아는 말씀을 통하여 주님이 심판한다는 것을 선포했다. 그리고 방주를 만들었다. 방주 자체가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 심판하신다는 것이 전제가 되었기 때문에 방주가 사랑이 되는 것이다. 그것처럼 인간이 얼마나 죄인인가 하면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죄가 없으신 자기 아들에게 진노를 쏟아부은 것 그 만큼 죄인이라는 말이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회개의 시작이다. 이것을 깨달을 때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를 위하여 죽은 것이라는 것이 믿어진다. 십자가에 대한 회개없이 십자가에 대한 믿음은 없다. 그냥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만 믿는다는 것은 거짓 복음이다.
하나님의 기준으로『모든 사람들이 각기 제 길로 갔거늘』라고 하는 것이 죄라는 말이다. 자기 소견대로 사는 것 자체가 주님이 진노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받는 믿음은 택하신 자들의 믿음이라는 말이다. 이 말씀은 두려운 것이다. 택하신 자들의 믿음이라고 했다. 택하신 것이 무엇인가? 마태복음 22장에 혼인잔치의 비유를 하면서 마지막에 예복을 입지 않은 자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이다. 22장 24절에서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택함을 입은 자가 적다고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의 확신은 택함을 입는 것이다. 구원의 확신은 출애굽이 아니다. 홍해바다의 기적을 경험해도 인간은 변화되지 않는다. 그것이 구원이 아니라는 말이다. 가나안에 들어가는 믿음이라야 된다. 이것이 택하시는 자의 믿음이라는 말이다.
애굽을 나오는 것도 보통의 일이 아니다. 바로왕의 권력을 주님이 심판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내셨다. 주님이 애굽에 말하기를『너희가 내 장자를 내어오게 하지 않으므로 너희들의 장자가 죽으리라』이것이 바로 유월절이다. 애굽에서는 곡성이 터졌다. 장자가 죽으므로 온 땅이 통곡하고 짐승까지도 통곡했다. 주님이 심판하신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부르짖어 나갈 때 세상의 속박으로 부터 우리를 건져내신다. 그리고 홍해바다가 갈라진다. 그러나 속박으로 부터 건져냄을 받고 홍해바다가 갈라지는 것을 보아도 그것이 구원은 아니라는 말이다.
유다서 1장 3절에서『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예수님의 동생 유다가 일반으로 얻은 구원에 대해서 편지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다. 일반 구원이라는 말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은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특별히 어느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구원을 특별히 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지만 잘못된 것이다. 기준은 변경이 없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이것이 발견되지 않으면 구원을 모르는 것이다. 종교인이나 비종교인이나 구원의 적용은 다 동일하다.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께 대한 믿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 믿음이 택한 자의 믿음이다. 하나님이 회개한 성도들에게 단번에 전달한 믿음이다.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믿음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믿음이다.『교회에서 믿습니다』라고 외치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믿음은 믿음의 대상으로 부터 오는 것이다. 내가 간절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변함이 없는 것을 알고 그 사람에게 주님이 주시는 믿음이다. 그리고 믿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택하신 자의 믿음이다. 회개한 성도들에게 단번에 주어진다.
그런데 교회 처음 나온 사람이『나도 예수 믿겠습니다』그리고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진지하게 예수를 영접하면 그 믿음이 구원받는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잘못된 믿음이다. 성도들에게 단번에 주어지는 믿음의 순간, 이것은 아브라함이 99세에서 백세가 되는 그 순간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 무려 25년이 지나서야 하나님으로 부터 의로 인정받은 것이다. 25년간 아브라함은 혈통으로 육정으로 사람의 뜻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드렸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기를 신뢰하지 않았다. 성경은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서 난 자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 세가지를 버려야 내적 변화가 있다. 사도요한이 말한 것은 바로 아브라함이 회개할 때 까지를 가리킨다.『자기를 신뢰하지 않을 때』가 바로 회개의 시점이다.
우리가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믿겠다』라는 믿음은 단지 우리의 믿음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바벨탑을 쌓는 믿음에 불과하다. 주님이 잔치를 예비해도 다 일치하여 사양하는 내용이 성경에 나온다. 노아가 방주를 만든다고 해도 일곱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다 일치하여 사양했다. 오늘날도 많은 교회에서 자칭 성도라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다 일치하여 사양하고 있다. 방주의 입구는 사형장과 같은 곳이었다. 방주의 컴컴한 곳에 들어가려면 모든 생각과 경험을 다 내려놓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오늘날『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을 내려놓으라』는 성경의 말씀을 받아드릴 수 있는 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대부분 이 말씀은 자신과는 별로 상관없는 말처럼 생각할지도 모른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노아가 부르짖는 소리를 농담으로 생각한 것처럼, 오늘날도 농담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십자가도 사형장이었다. 처참한 죽음 만이 있는 곳이다.『이 죽음이 바로 너야』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만 회개할 수 있다.『철저하게 내 뜻 내 판단대로 살아온 나』, 이 나에 대해 하나님이『너는 진노하는 죽음이야』라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는 자만 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 때문인 것을 깨닫게 된다. 중요한 것은 저 예수의 죽음이 나 때문에, 나를 위한 죽음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회개가 나오고, 믿음이 주어진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회개없이 십자가의 공로 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아무리 수없이 십자가를 찬양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회개가 바로 택하신 자의 믿음이다. 주님이 아브라함을 불쌍히 여겨 주셔서 25년간을 기다리신 것이다. 주님이 지금의 우리를 불쌍히 여겨서 기다려주시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임할 진노를 쌓고 있는 인생이 될지 알 수는 없다.
아브라함은 백세가 되어서 자식을 준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속으로 웃었다. 내 방식 대로 산다면『이스마엘이나 살게하소서』라고 말한 아브라함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교회 안에 내 방식 대로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싶다. 이 땅에서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면 하나님 나라를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를 본 적이 있는가? 이 땅에서 못보면 천국 못가는 것이다. 사람들은『육신 때문에 이 땅에서는 천국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육신을 벗으면 천국가리라』 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은 천국 갈 수 없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우편 강도는 아브라함이 25년간 걸린 믿음을 몇시간 만에 얻었다. 십자가에 매달린 채로 회개와 믿음이 동시에 주어진 것이다. 이 믿음이 택하신 자의 믿음이다.
가나안 정탐꾼 열두지파 중에 열지파도 다 신앙이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들어갈 믿음은 없었다. 그들은 육신의 믿음이었다. 가나안에 들어가면 죽는다고 생각한 것이다.『그곳에 아낙자손이 산다 우리는 메뚜기와 같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하나님이 보시기에』라는 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회개하기 전에 모든 인간은 다 거짓말쟁이다. 앞으로 일어날 일도 모른채 자기 뜻대로 말하는 자들이다. 가나안에 들어가야만 살 수 있다. 가나안에 들어가야만 천국 갈 수 있다. 그런데『들어가면 죽는다』라고 생각한다. 오늘날도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을 내려놓으면 죽는다고 생각한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은 다 거짓말쟁이들이다. 우리가 예수와 함께 죽는 믿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믿음이고 택하신 자의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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