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만 바라볼지어다
시편 105편 17-20절『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석방함이여 뭇 백성의 통치자가 그를 자유롭게 하였도다』
하나님이 요셉에게 꿈을 꾸게 해 주셨다.『해와 달과 별들이 요셉에게 절한다』는 내용이다. 꿈을 꾸게 하시지만 꿈을 이루게 하기 위해 연단도 주신다. 말씀을 받고 환상을 보았다고 좋아할 것이 아니다. 다윗은 목동으로 있었는데, 갑자기 선지자 사무엘이 와서 기름을 부었다. 기름붓는다고 왕이 바로 되는게 아니다. 사울이 죽이려고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아무리 은혜스럽고 좋아할 만한 꿈을 꾸고, 말씀을 받아도 더 두려워해야만 한다.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연단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요셉의 꿈에 반응한 형들은 요셉을 미워하게 된 것이다. 돈을 받고 요셉을 팔아버렸다. 요셉은 자기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인생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자기 인생이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결정되기도 한다. 다윗처럼, 인생이 내 뜻대로 안되고 나를 미워하는 손에 달려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게 연단이고 주님이 내 편에 서 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열심히 일하는 신세가 되었다. 열심히 일한다고 해결되지는 않는다. 보디발의 아내에 의해서 갇혀버린다. 종살이에서 옥살이로 바뀐 것이다.
다윗은 자기의 삶을 모세오경에서 발견했다. 그래서 진리를 알게되었다. 다윗은 시편에서『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라고 말했다. 주님 만을 바라볼 때 주의 뜻을 알게된다. 사람들이 하는 말과 내가 하는 말을 섞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섞는 것은 세상의 초등학문이다. 세상의 초등학문은 변증법과 같은 것이다. 외적인 환경의 이유와 내 자신의 내적인 이유를 합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주님의 뜻을 모르는 것이다. 인간들이 처음 반응하는 것은 핑계를 들이대는 것이다.『형들이 나를 미워하더니 팔려갔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티를 발견하는 존재다. 그래서 소경이라고 말한다.
처음 깨닫는 것은 핑계지만 두번째 깨닫는 것은 자책이다.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했으며 그 날도 형들의 일을 아버지에게 고자질했다. 그의 고자질하는 작은 허물이 청년기의 인생을 결정하게 된다. 17살 때 팔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주님은 이렇게 미워하는 사람의 손에 맡길 때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을 두려워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요셉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게 시편에서『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라고 말한 내용이다.
형들의 시기와 요셉의 허물이 만나서 생기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말이다. 나로부터 발생하는 나와 너의 문제가 아니라, 상황 속에서 주님을 바라보면서 이 일이 왜 생겼는가를 바라보는 것이 회개의 시작이다.『이 사람들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야』또는『나 때문이야』그리고 이 두가지를 섞어서 생각한다고 주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을 바라볼 때 주님의 뜻을 깨닫게 된다. 요셉은 은 삼십냥에 팔려갈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되는 것이다. 요셉은 은 이십에 팔려갔다. 요셉 속에 우리를 구원하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되는 것이다.
다윗은 시편 22편 1절에서『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괴로운 심정으로 기도했다. 예수님도 다윗이 고통 속에서 기도한 것처럼『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셨다. 다윗이 앞이 안 보이는데 고통과 절망 속에서 한 기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된 것이다.
이 땅에서 내가 원치않고 해결할 수 없는 길로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가게 되는 경우가 있다. 해답은『주만 바라볼찌어다』오늘 작은 일 속에서 상황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주만 바라보는 자는 주님이 함께 하신다. 그래서 큰 일을 닥쳐도 함께 하신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작은 일 속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게된다. 항상 나를 중심으로 나를 위해서 사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작은 일이기 때문에 아무도 인식하지 못한다. 작은 일에서 내가 주인인지 주님이 주인인지를 알게된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물로 심판하실 만큼 가증한 존재다. 그것이 작은 일에서 드러난다. 작은 일 속에서 주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내가 먼저이며,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주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스스로 해결 할 수 없는 큰 일을 주신다. 하나님이 인생의 풍랑을 주시는 것도『아무나』가 아니라『사랑하는 자』에게 주신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주님을 따르는 자에게 적용된다. 주님을 따르지 않는 자는 심판 때 까지 내버려두시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연단을 감사해야 하고 책망을 감사해야만 하는 것이다. 주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모든 연단과 고통에는 주의 뜻이 있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주의 뜻이 드러난다.『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종으로 팔렸도다』가 되는 것이다. 이게 주의 뜻이다. 주의 말씀이 요셉을 단련한 것처럼, 주와 함께 하는 자를 종으로 팔리게 하여 단련시키신다. 주의 뜻이 요셉에게 계시되는 것 처럼, 오늘날도 종으로 팔리는 그에게 주의 뜻이 계시되는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단련을 받는다.
다윗은 사울왕에 의해서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주님이 사무엘을 통하여 기름부었지만 왕으로 준비 안된 다윗에게 사울왕이 회개할 때까지가 아니라, 다윗이 회개할 때까지 연단하신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연단을 받을 때 회개해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계시가 깨달아질 때까지 회개해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계시는 십자가 죽음의 계시다. 우리 인생을 주님을 위해 드리기를 원한다면 야곱보다 힘센 에서가 나타나듯이, 우리보다 힘센 자가 나타난다. 주님이 그를 통해서 우리를 연단하시는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힘센 자를 절대 이길 수 없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를 강팍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욥을 사단의 공격에 내어준 것 처럼 열 형제가 요셉을 미워하게 만든 것도 주님이 허용하신 것을 잊지 말아야만 한다. 주님을 바라보기 전에는 주님의 뜻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계시가 깨달아 질 때까지 회개해야만 주님의 뜻을 알게된다.
그 때 다윗이 알게된 것은 사울왕이 나를 죽이려고 하는 이유가 내 안에 있는 것을 알게된 것이다. 그래서 그 이유를 알게 된 이후에는 시편에서 다윗이 주만 바라보는 자로 내용이 바뀐다. 다윗이 주만 바라보게 되는 자가 되므로, 장차 고난 받고 돌아가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되는 것이다. 이 땅에서 썩어질 것에 주님은 역사하지 않으신다. 오직 주를 향하는 자에게만 역사하신다. 성령의 마음과 육신적 생각은 공통 점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되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도 같다. 가나안 땅 앞에서 나타난다. 성령의 마음과 육신적 생각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갈라진다. 광야에서는 구분할 수 없다. 열정탐꾼은『들어가면 죽는다』라고 하고 주님은『들어가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라고 했다.
회개하고 그리스도가 계시되면 육신적 생각은 십자가에 못박게 되므로 성령이 역사하여 가나안에 들어가는 성령의 마음이 되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라고 했는데, 뱀은『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고 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인 성령의 마음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박아야만 한다.『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 이유다.
또한 육신의 생각은 바로 세상을 사랑하는 생각이다. 요한1서 2장 16절에서『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도 세상에 사로 잡혀있으면 성령의 마음이 없다는 증거다. 여호와의 말씀이 요셉을 단련한 것처럼, 고난받는 상황이 와도 주만 바라보는 자는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될 때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자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로 들어가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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