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도


고린도전서 1장 18절『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은사 많은 고린도교회에 사도바울은 성령의 능력을 말하지 않고 십자가의 도를 말하고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다. 십자가의 말씀,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도가 회개한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이다. 회개한 자가 아니면 십자가를 따를 수 없기 때문이다. 광야에서 애굽을 나온 백성들이 원망해서 의로우신 주님이 불뱀을 보내셨다. 그러나 그들이 부르짖어 회개할 때 놋뱀을 보내시는 분이다.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데, 『놋뱀을 쳐다보는 자는 살리라』는 말을 순종하는 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자는 회개하는 자에게만 가능하다. 회개하는 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자이기 때문이다.
『모세가 놋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교회 사람들은 불뱀에 물리면 누구든지 다 쳐다볼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실제 그 당시에 있었다면 거의 쳐다보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이 놋뱀처럼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에 똑 같이 일어났다. 그 때까지 제자들은 삼년동안 직장을 버리고 가정을 버리고 전심으로 예수를 쫒았다. 그들은 베드로의 고백처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이시며 구원자라는 것을 의심없이 믿었다. 풍랑을 잠잠케 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과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그 광경을 목격한 자들이었다. 제자들의 믿음은 삼년동안 시간이 갈수록 커져갔다. 그러나 십자가의 사건이 있기 전에 예수님은『너희들은 오늘밤 다 나를 버리리라』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제자들 전부『우리는 주를 버리지 않습니다』 라고 말했다. 주님은 버린다고 하고 제자들은 안 버린다고 말했다. 제자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를『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제자들이 경험으로 지식으로 아는 예수님의 모습이다. 자기를 더 신뢰하는 모습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 사람들의 모습일 것이다.
주님이 빛을 비추어서 보게하지 않으면『자기』라는 존재를 알 수 없다. 그래서 회개가 되지 않고,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날 밤 베드로가 가장 강력하게 말했다.『이 사람들은 당신을 버려도 나는 결단코 주를 버리지 않습니다』예수님은『너는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번 부인하리라』라고 말했다.『세번 부인하고 버린다』는 말이다. 베드로는『나는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결단코 주를 부인하지 않습니다』라고 강하게 말했다.
베드로는 그 동안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되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이 경우는 아니라는 것이다. 하늘에서 빛을 비쳐주셔서 어두움에 갇혀있는 자신을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지식과 결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적변화가 없으면 안된다는 말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는『날마다 죽으리라』가 아니라 성령으로『날마다 살리라』를 강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살아야 하지만 죽지 않으면 새생명으로 태어날 수 없다. 대부분 교회 사람들이 찾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기쁨이 되고 있다. 인간의 내면에 더러운 자아가 가득차 있다면 은혜와 기쁨을 찾는다고 되겠는가? 더러운 자아는 죽어야만 한다. 그래서 회개하는 것이다. 회개는 날마다 자아가 죽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주님이『오늘밤 다 나를 버리리라』라고 한다면『무슨 말씀입니까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 십자가 당시에 있었다면 다 도망 갈 것이다. 왜냐하면 그 순간 두려움에 휩싸이는 자아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삼년 동안 기적의 주님을 함께한 베드로처럼, 오늘날에도 많은 교회 사람들이 자아가 작동한다면 모두 다 예수를 버릴 것이다. 자아를 부인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자아는 내 경험, 지식, 감정, 결심들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모든 것을 다 믿고 있었는데, 단 하나『예수님이 고난받고 죽는다』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인자가 오는 것은 죽으러 왔다』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오늘날도『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못박히신 십자가의 사건보다 부활을 더 강조하는 자는 회개하지 않은 증거다. 부활은 내가 추구한다고 오는 것이 아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30절까지 부활을 말하고 있는데, 부활을 말하고 31절에서는『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말했다.
부활을 말하면 날마다 죽어야만 한다. 그러나 육체로 비롯된 본성대로 산다면 날마다 살고 싶어한다. 지금 육으로 비롯된 것이 죽고 새생명으로 부활하여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기쁨으로 누리는 것보다, 육체의 눈으로 당장 이 세상이 좋게 보이기 때문이다. 회개한 자,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었다는 감격이 있는 자는 날마다 죽은 예수를 위해 살고, 육적 자아가 죽는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세상에 대하여 날마다 살고 싶어 하는 것』은 회개한 적이 없이 예수의 피 공로 만을 의지하려고 하기 떄문이다.
십자가의 죽음 속에 예수와 함께 있다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시고 새생명으로 부활시키신다. 그런데 십자가에 있지도 않으면서 부활을 추구한다는 것은 모순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의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가 되어야만 되는 이유다. 회개하는 자만 십자가로 들어간다. 죄에 대해서 죽고, 율법에 대해서 죽고,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죽는 것이다.
십자가보다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여 말한다면 미혹일 뿐이다. 계시록에서는 적 그리스도가 나타나는데도 성령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회개하여 죽임당한 어린양을 따르는 자만 이기는 자가 된다고 말한다. 이런 자가 생명책에 기록된 자다.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적 그리스도의 표를 받지 않는다. 회개하여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이기는 자다. 회개는 예수가 주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해야만 한다. 예수님이 주인되기 전에는 예수의 피의 공로는 역사하지 않는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는다고 예수가 주인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가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라는 주인이 예수로 바뀌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적 변화다. 예수가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십자가로 들어가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십자가로 들어가지 않은 모든 자는 회개하지 않은 채 자기가 주인이다.『예수님의 피가 모든 죄로부터 구원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여 십자가로 들어오지 않으면『너는 나를 버리리라』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실 것이다. 
내가 쌓은 믿음과 십자가 속에서 예수와 연합된 믿음은 분명히 다르다. 내가 쌓은 믿음은 오직『내가 구원받으려는 믿음』이다. 그러나 십자가 속에서 연합된 믿음은『자기를 포기하는 믿음』이다.『자기』라는 마귀의 정체를 깨닫지 못한다면, 다 예수를 버리는 자가 될 것이다. 자기가 쌓은 믿음은 십자가에서 다 부셔져야만 한다. 마귀는 십자가에서 다 부셔진다.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너희는 너희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행하고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행한다』고 했다. 그들은 성경적 고백을 한다.『우리 아버지는 한 분 뿐이시니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라고 하니 예수님은『너희 아비는 마귀니라』라고 하셨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 사람들이『예수를 믿는다』고 한다.『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한다. 그리고『예수님은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이렇게 말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들어가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십자가에 들어가지 않으면서 구원받았다고 믿는 자들은 마귀에게 속은 것이다. 율법에 갇혀있기 때문에 속은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율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십자가로 들어가면 육적인 것이 죽을 것 같이 느껴지기 때문에 들어가기를 주저하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은 증거다. 회개하는 자는 십자가의 주님 만을 바라본다. 회개하지 않은 자는 상황에 반응하고 문제의 해결 만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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