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갈라디아서 3장 23절『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오늘날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믿음 생활을 하다가 어떤 상황에서 믿음이 떨어지는 것을 경험한다. 그래서 믿음을 더욱 굳건히 가지고 믿음을 쌓으며, 신앙생활을 잘 하려고 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주여 믿음을 더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처럼, 늘 믿음이 부족한 것을 절감한다. 사실상 구원의 확신만을 붙잡으려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너희가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으면 산을 옮길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과장된 말씀처럼 느껴지는데 받을 수 있는가? 그런데 이 말씀에서『믿음이 온다』는 것을 주목해야만 한다.『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믿음이 부족한 것을 느낀 사람들은 다『계시될 믿음』이 오기 전의 상태인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큰 빛과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 순간 믿음이 온 것이다. 그런데, 14년간 시내산이 있는 아라비아로 갔다.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으로 사로 잡혔는데, 왜? 홀로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의 기간을 가지면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룰 때까지 해산의 수고를 겪었는가? 그는 율법이 성화냐 아니면 칭의에 이르는 과정이냐를 고민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따르는 것을 성화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예수님이 세레요한의 세례를 받고 삼년간 성화의 길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삼년 뒤에 예수님은 『오늘밤 너희는 다 나를 버리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삼년간 예수님과 동행하고 온갖 기적을 체험했는데, 성화되어서 예수님을 따라야지 왜 부인하는가? 예수님을 다 부인하므로 성화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믿음이 오기 전이기 때문에 다 율법 아래 매여있는 것이다. 아무리 노력하고 은사를 받아도 변하지 않는 것이다. 믿음이 오기 전은 성화는 커녕 구원받지 못하는 믿음이다.
성경은 더러움을 먼저 씻는 것이 아니라 어두움을 해결하는 것이다. 성경에『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라고 말씀하셨다. 스불론과 납달리 땅의 어둠에 앉은 백성에게 큰 빛이 비추었고,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빛이 비추었다고 말했다. 구원의 시작은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허물과 죄로 죽어있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그래서 먼저 죽은 자가 살아나야만 한다. 베드로는『너희가 각각 회개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고 말했다. 세례에 대해서 많은 교회에서 잘못 인식하고 있다. 세례는 죄를 씻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이다.
하늘의 모형인 성막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놋제단이다. 성전 마당에 있는 것은 심판을 나타낸다. 휘장 안에서부터 금으로 되어있지만 성전 마당은 놋으로 되어있다. 놋제단은 양을 죽이는 곳이다. 죄인이 양과 함께 죽는 곳이다. 따라서 죄인이 예수와 함께 죽는 곳이다. 양을 안수하고  피를 빼서 죽인다.
예수님이 내 대신 죽는 것이 칭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사람들의 죄에 대해서는 무엇인가 할 것이 없다. 내 선행도 소용이 없고, 어떤 노력도 소용이 없다. 오직 예수의 죽으심과 그 피로만 사람들의 죄가 씻어진다. 어린양을 죽여야지만 그 피가 역사한다. 성찬에서 함께 떡을 뗀다는 것이 죽은 양의 고기를 먹는 것이다. 죽은 고기를 먹으면 피가 역사한다. 그 다음에 옆에 물두멍이 있는데, 깨끗하게 씻는다. 양을 죽여서 피가 묻는다. 그래서 새 예복을 입고 성소로 들어간다. 씻지 않고 들어가면 죽는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성화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죽음의 세례다. 이게 되기 전에는 성화는 커녕, 믿음은 오지 않은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셔서 휘장이 찢어질 때까지는 다 구약의 율법 아래 매인바 된 것이다. 십자가에서 예수의 죽음을 통해 율법으로부터 벗어난다. 예수와 함께 죽은 자가 율법으로 부터 벗어날 수 있다. 기적의 주님을 따르고 말씀을 듣고 배우지만, 못박히신 주님을 따를 제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여전히 율법에 갇혀 예수님을 다 부인하고 도망가버린 것이다. 못박히신 예수님과 연합되는 길은 자기를 부인하는 회개 외에는 방법이 없다. 이게 세례다. 세례는 사람들이 의지하는 지식과 경험에 의해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지식과 경험이 쪼개어져서 육체 속의 신비함으로 이해되어져야만 한다.
로마서 6장 2절에서『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죄 안에 살면서 죄 사하심을 얻을 수 없다.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서 열심히 믿으려고 하면 하나님 욥처럼 사탄에게 넘겨버릴지도 모른다. 열심히 믿으려고 하면 사탄이 주는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열심히 믿으려고 하는 사람은 먼저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어야만 한다. 예수님은 사탄의 밀까부르듯이 하는데서 넘어지지 않도록 기도한다고 하셨는데, 제자들에게 넘어진다 하셨다.『너희는 오늘밤 다 나를 버리리라』라고 하셨는데, 예수를『버리는 것』이 헬라어로『넘어지다』는 뜻이다. 십자가 앞에서는 다 버리는 자들이다. 열심히 믿으려고 하지만, 자기부인의 회개없이는 결국 십자가 앞에서 다 넘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 전에는 믿음을 더하게 하려고 애썼지만, 자기부인의 회개를 하지 않으면서 믿음만 강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놋제단에서 어린양이 죽고 각을 떠서 불에 태워 죽이는 것이다. 그런데 놋제단에서 죽어야 하는데 양만 죽고, 사람은 죽은 양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세례다. 에베소서 2장 1절『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헬라어 원본에는『너희는 허물과 죄로 죽었었느니라』라고 되어있으며,『너희를 살리셨도다』라는 말은 우리말 번역과정에서 이렇게 된 것 같다. 허물은 세상죄를 말하고, 죄는 조상으로부터 육체를 통하여 전가된 죄를 말한다. 그래서 육체로부터 난 것은 죽고, 다시 하늘로 부터 태어나야만 한다.
현실적으로 육체를 죽일 수 없으므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것과 다시 사는 것을 믿는 것이다. 구원은 사람들이 죽어있는 자라는 것을 아는 것에서 시작된다. 죽어있으므로 살아나야만 한다. 살아나는 자는 회개하고 자기부인의 삶을 사는 자들이다. 회개하는 자만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논제단과 물두멍을 지나서 성소로 들어가는 자를 주님이 영접하시는 것이다. 성전이 거듭난 자의 육체를 말한다. 그 다음에 진설병의 떡을 먹고, 등불을 켜서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 에베소서 2장 1절은 세상 죄와 부모로부터 전가된 죄로 죽어있는 것이다. 그래서 전가된 의가 필요하다. 우리가 쌓은 의가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전가된 의가 필요하다. 그래서 먼저 내가 세상에서 지은 죄를 깨닫고 죄를 자복한다. 그 다음에 육체의 생명을 얻어서 전가된 죄를 해결해야만 한다. 전가된 죄는 죽음(자기부인)으로 해결된다. 세상에서도 죽은 자는 기소당하지 않는다. 예수와 함께 죽어야만 한다.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는 순간, 십자가에서 다시 살아난 자에게 예수님의 의가 전해지는 것이다. 이것을 칭의라고 한다.
오늘날은 예수믿으면 의롭다 하심을 얻어서 거듭난다고 말한다. 순서가 꺼꾸로다. 자기부인의 회개가 없으면 거듭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자기가 주인됨을 포기해야만 한다. 자기가 주인인 사람은 마귀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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