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간이 진노의 자식이라


요한복음 13장 1절『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그런데 2절에서『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고 말씀했다. 가롯유다는 돈 궤를 맡은 자였는데, 그는 돈을 사랑하는 자였다. 사탄은 자기가 가롯유다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겨우 은 30냥에 예수를 팔고 싶은 소원을 갖게 만들었다. 마귀가 원할 때 언제든지 그렇게 할 수 있는 자들이 있다.
38절에서는『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님의 죽음을 알아차린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할 때『그녀를 기념하라』고 하셨다.
예수님은『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한다』고 하시면서『오늘밤 다 버리리라』라고 하신 의미가 무엇인가? 주님이 축복과 은혜를 주신 만큼 주님을 따를 수 있지만, 거듭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믿는다고 거듭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아차린 사람은 세례요한이었고, 그 다음으로는 귀신들이었다. 귀신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기 전에는, 아무도 못박히신 그리스도에게로 갈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진리를 말씀하시는데, 아무도 그 말씀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다. 진리를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다 나를 버리리라』라고 했는데, 아무도『버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진리의 사랑을 선포하고 있지만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베드로가 세번 부인하고 난 다음에 눈물을 흘린 것은『죄를 용서해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내가 소경이구나』라고 고백하면서 우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진리의 사랑을 말씀하시는 것도『너희들이 다 소경이라』는 것을 깨우쳐주기 위함이었다.
다윗도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말하는 죄를 지었다. 하나님이 나단을 통해서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다.『그 자는 죽어야 한다고 말한 이가 바로 당신이야』라고 말했을 때, 그가 깨달은 것은 소경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자, 회개하지 않은 자는 소경이다. 그런데 교회를 오래 다녀도 이를 모른다면 소경이라는 말씀이다. 소경은 어두움에 있다는 뜻이다. 성경을 아무리 읽고 깨달아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모르면 소경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은 모든 인간이 진노의 자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런 역사가 없는 것이다.
교회에서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얼마나 많이 들었겠는가?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믿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적으로 여전히『내가 허물과 죄로 죽은 자』라는 것을 깨닫는 자가 얼마나 많겠는가? 죽은 자의 특징은 철저히 자기 중심이다. 그 아비가 마귀이기 때문이다. 허물과 죄로 죽었다는 것은 적극적으로 세상을 위해 살고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나의 현재적 생활이 서로 별개인 사람은 회개한 적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육체가 원하는 대로 사는 자기의 삶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나가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므로 소경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구원받는 자가 아니다. 영적 간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마귀가 이런 자에게『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안심하게 만드는 것이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변화된 삶이 없다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그 날에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니라』라고 하셨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인생들의 삶이 일치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인생들의 자기부인은 일치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연합이다. 인생들은 예수의 죽으심이 자기 때문이라고 믿으면서도, 여전히 세상의 부와 재물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사랑하고, 마귀가 주는 것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할 수 있나니』이게 거듭난 자다. 오직 거듭난 자는 주의 영으로만 이루어지게 하시는 것이다. 사람의 뜻으로 하는 자는 거듭난 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주님의 영이 역사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되어야 하는 것이다. 연합은 바로 세상에 대해서 탐욕의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회개하는 자 외에는 이런 연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회개는 죄의 결과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 둔감한 자신을 발견하고, 죄에 대해서 죽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할 때 죄를 사하심을 받는다. 로마서 6장 6-7절에서『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베드로가 세번째 부인했을 때, 주님이 처음 베드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서로 눈이 마주쳤다. 놀라운 것은 그 순간 도망가버린 것이다. 이게 베드로의 절망이고 모든 인간의 전적타락인 절망이다. 인간 속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는 전적타락의 모습을 베드로를 통해서 나타낸다. 나는 소경입니다.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세번 부인할 자라는 것을 고백하는 자만 주님의 긍휼을 구할 수 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에 매여 있는 자들은 자신이 소경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가 된다. 소경이 된 자는『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자가 된다.
천로역정의『존 번연』이라는 사람은 예수를 믿기로 한 날로부터 하루에 교회를 두번씩 가기로 작정하고 매일 성경을 읽었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성경의 좋은 귀절을 말해주는 것을 듣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7년 동안의 생활을 통해서 자기는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죄를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동물을 바라보면서 회개할 필요가 없으므로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동물보다 못한 자라고 생각했다. 회개는 무엇인가? 회개했는데도 죄를 벗어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회개는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다. 회개는 그 열매가 반드시 뒤따라야만 한다. 죄를 고백하고 또 죄를 짓고, 또 죄를 회개하고 다시 죄를 짓는 것이 진정 회개한 것인가? 열매가 없다면, 변화된 모습이 없다면 회개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회개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의 합당한 열매가 있어야만 한다.
성경을 읽고 깨닫는다고 회개한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아가는 변화된 삶이 있어야만 한다. 로마서 12장 2절에서『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다. 주를 위해 사는가 아니면 나를 위해 사는가의 모습은 열매로 알 수 있는 것이다. 도대체『나』라는 존재는 누구인가? 왜 나를 위해 사는 것이 행복하고 좋게 보이는가? 그 속에 탐욕이라는 우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해야만 살 수 있다. 이게 회개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혼과 영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하며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