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


고린도후서 5장 17절『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노아는 120년간『회개하라』고 의의 도를 외쳤다. 사람들이 어려서부터 악하다는 것이다. 죄인에게 필요한 것은 의의 도지 사랑의 도가 아니다. 세상에 역사하는 것은 진리의 영이다. 그래서 세상에 대해서 세가지를 책망한다고 사도 요한은 말한다.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한다고 했다. 이게 바로 노아가 전한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 이 모든 것의 결과가 사랑이다. 의와 사랑은 양분되지 않는다.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회복되어야만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된다.
하나님의 의가 없는 하나님의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속성은 구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다. 의를 전파되는 곳에 주님이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다. 방주를 만드는 노아와 7명의 가족 외에는 의의 도에 반응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오늘날은 주님이 재림하실 수 있는 역사의 끝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중세 때를 암흑시대라고 하는데, 오늘날은 그 때보다 더 캄캄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진리 외에는 깨어날 수 없지만 오늘날은 사랑의 성령이라는 노래까지 등장했다. 사랑의 성령이라는 말은 없다. 진리의 영이라고 한다.
노아시대 사람의 생각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해서, 어린아이들 조차 노아가 만든 방주에 들어가기를 거절했다. 노아가 외치는 의의 도에 반응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악하고 선한 기준은 하나님에게 달려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만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것이다. 노아시대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렸을 것이다. 예배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여 하나님과 동행해야만 구원받는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 아래 있는 인간들에게 은혜 아래 있도록 바꾸어 놓은 줄 생각한다. 그러나 바뀐 인간이 은혜 아래 있지, 바뀌지 않은 인간은 율법 아래 그대로 있는 것이다. 바뀜에 대해서 요한계시록이 증거한다.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천국을 갈 수 없다. 그러나 죄인은 계명을 지킬 수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회개 뿐이다. 회개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죄인이 은혜로 나가는 것이 구원이다. 회개는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다. 성경에서 구원의 조건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회개의 열매는 주인이 바뀌는 것이다. 나는 죽고 예수만 주인이 되는 것이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가 주가 되게 하신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해 주신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선물로 얻게 된다. 이것만이 구원이다.
성경에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많다. 서도행전에서 마술장이 시몬처럼, 요한복음8장에서 예수를 찾아온 유대인처럼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님은『너희 아비는 마귀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요한1서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난자라고 말한다. 하나님께로부터 난자는 마귀가 만지지도 못한다고 말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자만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된다. 노아가 전파한 의의 도를 들었을 때 깨닫는 것은 인간은 불의하다는 것이다. 노아가 전한 7명 외에는 깨닫지 못한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믿는다고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십자가의 도는 어린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멸망하는 자에게는 방주와 같이 미련하게 보인다. 비가 온 적이 없는데, 축구장 보다 큰 방주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미련하게 보이겠는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을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미련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은 방주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지만 방주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소용없듯이, 마찬가지로 죄인들을 대속하기 위해 오신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지만 십자가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십자가 안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야만 구원받는다. 이게 회개다.
회개는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게 되는 것이다. 세례는 노아의 방주 때 물에 멸망한 옛세상을 가르킨다는 것이다. 주님 우리는 노아 때 살았더라면 노아가 전한 의의 도를 받지 않아서 우리도 방주에 들어가지 않고 물 속에서 죽어야 할 자라는 것을 고백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세례는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이다. 세례는 죄를 씻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래서 죄를 씻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해서 죽어야 할 존재들인 것이다. 로마서 6장 7절에서『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인간은 이런 존재라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회개하지 않은 것이다. 모든 인간은 마음의 결단만 하면 개선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마음의 결심으로 계명을 지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상태가 오면 더 큰 결심으로 마음을 다 잡는다. 이렇게 생각하는 자는 회개한 적이 없는 것이다. 회개는 생각의 결심이 아니라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성경에는 예수를 믿지만 회개한 적이 없는 자의 모습이 나온다. 회개한 적이 없는 자는 거듭나는 것을 받을 수 없다. 거듭나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옛것이 죽어야만 가능하다.
그래서 회개는 옛것이 죽는 것이다. 옛것이 죽지도 않았는데, 거듭났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열매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회개했는데,『아차 믿음이 부족하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믿는다고 하지만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 성경에서 열처녀의 비유다. 이 비유는 예수님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신 비유다. 등불을 켰는데, 기름이 모자라는 것이다. 다 출발이 잘못된 것이다. 회개하지 않은 증상이다. 열처녀의 비유 앞에는 왕의 혼인 잔치에 예복을 입지 않은 자의 모습이 나온다. 아무도 혼인잔치에 오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노아의 방주 때와 같은 것이다. 아무도 오지 않은 이유는 신명기에서 말하는 축복, 집을 샀기 때문에, 밭을 샀기 때문에, 소를 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다음에 비유는 시집가고 장가가고 했기 때문에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죄 때문에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에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신명기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 때문에 오지 않았다. 이것은 불순종의 문제다. 불순종은 자기가 주인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자기가 주인이므로 자기 일이 더 중요하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 사람들은『내가 죄인임을 다 인정하고 오직 예수님의 피로만 죄가 다 사해짐을 믿어, 그래서 구원받는다』고 믿는다. 구원의 핵심은 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죽는 것이다. 우리는 옛것이 죽어야만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든 문제는 옛것이 죽지 않기 때문이다.
분노가 그 대표적이다. 분을 품지말라고 했다. 성경에서 분노가 죄의 입구다. 분노의 표현은 지옥불에서 나오는 불과 같다. 분노가 나면 죄가 나타나는 것이다. 분노를 표출하는 자는 거룩한 자가 아니다. 거룩한 자는 성령을 따르는 자다. 분노가 사라지고 오직 인내로 성령을 따르는 자가 거룩한 자다. 회개없이는,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아무도 이렇게 되는 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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