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창세기 39장 1-3절『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요셉이 팔려갔지만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주의 길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육신을 따르는 삶은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따를 수도 없다는 말이다. 교회 안에서 기복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면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가 되지 못하므로 몸은 교회에 앉아있지만 하나님을 떠난 자라고 말할 수 있다. 보디발은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라고 했다.
39장 19-23절에서는『그의 주인이 자기 아내가 자기에게 이르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형통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 주인을 겪노케 만들었다. 그래서 요셉을 감옥에 넣어버렸다. 그런데 감옥에서 주님이 요셉과 함께 했다고 말한다. 형통케 했다고 한다. 형통이라는 말은 이 세상적인 말과는 다르다. 세상에서의 형통은 돈과 권력과 명예가 주어져서 행복을 누리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듣게 되는 형통은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을 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형통함이다.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삶이다. 그 기준은 하나님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요셉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계속 형통했다는 말씀이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그리고 감옥에서 주님이 만드시는 것이다. 창세기 40장에서는 갑자기 꿈이 해석되는 것이다. 성경에 그 과정은 소개되지 않는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고 죽으셨다. 그래서 아리마대 요셉이 자기의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지냈다. 그리고 제삼일에 부활하셨는데, 성경에는 몇 구절이 있지만, 삼일 동안에 무엇을 했는지는 성경에서 설명하지 않는다. 99세에 하나님이 아브람을 불렀다. 그때 아브람은 이스마엘에게 완전히 마음이 빼앗겼다. 하나님은『내년에 내가 약속한 자녀를 주리라』라고 말했다. 그런데 아브람이 속으로 웃었다. 『이스마엘이나 당신 앞에서 살게하소서』라고 대답했다. 아브람은 99세까지는 육신의 방법대로 사는 그런 자였다.
오늘날도 누군가의 인도로 교회에 와서 예수믿기로 했지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여전히 육신에 따라 사는 자가 된다. 비록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믿으며, 거룩한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요셉이 옥에 갇히는 것과 같이, 자아가 죽지 않으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형통한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브람은 비록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여정을 해 나갔지만, 약속의 자녀는 믿지 못하는 것이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교회를 나왔지만 약속의 씨를 주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약속의 씨는 육적인 것이 죽어야만 새생명이 들어오는 것이다. 한 알의 밀알이 심겨져 썩어야만, 생명이 역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할례를 행하게 하셨다. 로마서 4장 18-22절에서는『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중간 과정은 설명이 없다. 할례로 말미암아 아브람은 아브라함이 되는 것이다. 할례는 육신의 몸이 죽는 것을 말하고, 약속의 씨가 있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다. 오늘날도 주님은 우리에게 세례를 통해서 육신적인 것은 죽고, 새생명이 임하게 약속하신다.
세례 이후, 주님은 우리를 그의 죽으심을 본받는 삶으로 이끄신다. 오직 거듭난 자만 그렇게 하신다. 요셉은 형들의 시기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처럼, 그 길을 가게 하셨다. 형들은 은20냥을 받고 팔았다. 예수님도 가롯유다의 손에 은30냥으로 팔린 것과 같은 것이다. 요셉은 팔려갈 때 매였다고 한다. 그런데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는 갇힌 자가 된다. 요셉이나 아브람이나 그 중간 과정은 육신적 삶을 버리는 모습을 바라본다. 감옥에서 요셉은 창세기 40장에 가서 꿈이 해석되는 것이다. 요셉은 꿈 때문에 망했지만, 꿈 때문에 부활하게 된다. 오늘날도 주님은 회개한 자를 요셉처럼 만드신다. 이것이 이 땅에서의 구원이다.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요셉의 자손들이 출애굽하고, 광야에서 옛사람이다 죽고, 새로 태어난 새생명이 가나안으로 들어가, 가나안 족속들을 멸하여 이기는 자의 삶을 살게 하시는 것이다. 옛사람은 비록 출애굽했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지 못했다. 아브람은 씨의 약속을 믿지 못했지만, 출애굽한 옛사람들은 약속의 땅을 주시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천국을 볼 수 있다는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거듭나는 것은 엣사람은 죽고 새사람이 태어나는 것인데, 옛사람의 옷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버리고 돌아오라는데,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죄의 문제만 해결하려고 한다. 회개하지 않은 자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다. 죽지 않은 옛사람에 불과하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이 옛뱀처럼 숨어서 자기가 주인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옛사람은 입을 열면 지옥불에서 나오는 죽음의 말들을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열정탐꾼의 말은『들어가면 죽는다』라는 것이다. 자기도 죽고 남도 죽이는 말들을 쏟아내는 것이다. 열정탐꾼은 그렇게 하는 것이 사는 길인 줄로 생각했다. 육신을 따른다면, 이게 오늘날 많은 교회 사람들의 모습일 것이다. 교회를 다녀도 회개한 적이 없는 구원받지 못하는 자가 된다. 스스로는 회개했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옛사람의 옷을 걸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옛사람의 옷을 벗으라고 하시는데, 그 옷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지만 실상은 죽은 자가 된다. 교회 안에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다가, 둘 다 구덩이에 빠져 죽는 것이다.
오늘날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그런 상황이 되고 있다. 역사의 끝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새벽이 다가오고 있다. 가장 어두운 때를 지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마지막 때는 롯의 때와 노아의 때와 같다고 말한다. 오늘날은 동성결혼의 합법화가 전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유전자 조작과 같은 창조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들과 인공지능 개발로 인한 인간의 존엄성이 사라지고 있는 현실에 살고 있다. 세상의 잠에서 깨어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만 살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은 온 세상을 불로 심판하시려고 준비하시고 있을 것이다. 그 때가 언제인지 알 수 없으나 상황을 통해서 판단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노아시대는 물로 심판했지만 예수님이 다시 오신 후에는, 하늘과 땅을 불로 멸하실 것이다. 베드로후서 3장 10-13절에서『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그리고『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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