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한 자에게 주시는 선물
고린도후서 5장 17절『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새로운 피조물이 부활이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태어난 거듭남이다. 새로운 피조물이 새 창조가 된다. 이전 것이 죽은 자만 가능하다. 이전 것이 죽는 것이 회개의 본질이다. 죽는 것이 세례의식이다. 로마서 6장 4절에서『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서『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 된다. 15절에서는『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이게 회개의 본질이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사람들이『예수님이 자신을 위해 죽었다』고 믿지만, 자신은 죽지 않고, 자기를 위해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즉 자신을 위해 사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회개한 적도 없고,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생각으로는 예수가 나를 위해 죽었다고 믿지만, 현실적으로는 죽지 않으므로, 날마다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비는 것이다. 구원은 옛사람이 처리되어야만 한다.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 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결국 자기부인의 회개없는 사람은 예수님은 나를 위해 필요한 존재일 뿐이다. 병을 고쳐주시고, 안정을 주시고, 행복을 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구원은 회개한 자에게만 주시는 선물이다. 갈라디아서 6장 15절에서『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For in Christ Jesus neither circumcision availeth any thing, nor uncircumcision, but a new creature.(kjv) 우리말 번역에는『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이 빠져있다.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가 새로운 피조물이다. 즉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다. 고린도후서나 갈라디아서나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같은 말씀이다.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믿음은 아브라함의 예가 아니라,『이삭이냐 이스마엘이냐』를 말하는 것이다.『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가 아브라함의 불순종이였다. 성령으로 시작한 것이 바로 하나님이 자녀를 준다는 것을 믿은 것이다. 그러나 기다려도 자식을 주시지 않으므로 이스마엘을 낳은 것이다. 이게 믿지 않은 육체의 자녀라는 것이다.
하나님은『이스마엘은 유업을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부모로부터 받은 육체는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을 수 없다. 영이 죽어 있기 때문이다. 오직 신령한 몸으로 거듭난 자만 받을 수 있다. 신령한 몸에 거하는 자가 하나님의 형상인 영적 존재라는 것이다.
구원의 확신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오직 거듭난 자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가 아니면 하나님 나라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3장 5절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라고 밝히고 있다.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가 하나님 나라로 들어간다.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는『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가 된다.『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노아 시대의 방주와 같은 개념인 것이다.
십자가가 없는 부활은 없으며,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지 않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새로운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영접하는 자』는 13절에서『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어 죽은 것 같이 되었을 때의 말씀이다.
아브람이 75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했는데, 25년이 지난 100세가 되어 하나님이 완전히 순종하는 자로 인정하신 것이다. 25년간 부모로부터 받은 혈통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아브람은 친척 롯을 데리고 나왔으며, 엘리에셀(고향)을 상속자로 여기다가, 결국 이스마엘(혈통)을 낳았다. 육체로 비롯된 마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도 의롭다 하심을 얻는 그런 믿음이 없는 것이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그런 믿음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뿐이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99세가 되던 해에 나타나셔서『내년에 자식을 주겠다』고 하고 할례를 행할 것을 명하셨다. 아브람은 믿지 않았다. 속으로 웃은 것이다.『어찌 자녀를 낳으리요 이스마엘이나 살게하소서』라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다. 자기가 주인이라는 뜻이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세상은 애굽을 상징한다. 히브리 백성이 애굽을 나온 것을 세상으로 부터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광야에서는 그들이 애굽을 버리는 것이다. 애굽에서 장자의 장례식 날 출애굽했다. 홍해바다는 애굽과의 단절이다. 그러나 광야로 나왔다고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가야만 구원받는 사실이다. 광야에서 옛사람은 모두 죽었다. 옛사람은 애굽을 동경하고,『가나안에 들어가면 죽는다』라고 믿었던 자들이다. 우리도 옛사람이 죽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옛사람이 바로 부모로부터 받은 육체에 거하기 때문이다. 믿음은 지키는 것이다. 육체가 죽을 때까지 싸워서 지켜나가는 것이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 있지만 광야에서 싸워야 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무엇과 싸우는가? 바로 옛사람이다. 옛사람이 죽어야만 한다. 거듭나기 전에는『나는 죽노라』가 되어야만 하지만, 거듭난 자는『나는 죽었노라』가 된다.
옛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될 때 죽는다. 그 이유는 옛사람이 바로 뱀의 머리 통이기 때문이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하나님은 약속하셨다.『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죄사하심을 받으면 구원받는 줄로 생각하지만, 죽지 않으면 구원은 없다. 로마서 6장 7절에서 처럼,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난다. 옛사람이 죽어야만 죄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옛사람인 뱀의 머리통이 살아 움직이는데, 예수의 피로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옛사람이 죽은 자가 예수의 피가 적용되는 것이다.
옛사람은 뱀의 머리통이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 하나님 앞에서 전적타락,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모든 사람들, 예수와 함께 못박히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게 바로 옛뱀(사탄, 마귀)의 머리통이 웅크리고 있는 것이다. 옛뱀의 머리통이 죽지 않는한 구원받지 못한다. 세상에서 아무리 스스로 선하게 살았다고 생각할지라도,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지 않으면, 옛뱀의 머리통은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옛뱀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하나님을 대적한 자이고, 사람의 마음 속에 옛뱀의 머리통이 살아 있는 자들도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사탄을 따르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옛사람을 용서하시지 않는다. 옛사람은 용서의 대상이 아니라 죽어야 할 대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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