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을 알게 하소서
에베소서 1장 17-18절『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여기서『너희 눈을 밝히사』육적 눈이 아니라 영적 눈을 밝힌다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고 누릴 수 있었다. 하나님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했는데, 한 계명으로 된 언약을 지키지 못하므로, 뱀에 속아 그 과일을 먹고 말았다. 그래서 눈이 밝아져, 벗은 것을 깨닫고 수풀 속에 숨었다고 한다. 아담과 하와가 눈이 밝아진 것과 사도바울이 에베소서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마음의 눈을 밝히사』와는 다른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아는 마음의 눈은 어두워져 버렸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여러 어려움이 닥치지만 어떤 눈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하나님께 반응은 달라질 것이다. 수풀 속에 숨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는가? 예수님을 죽였던 자들은 제사장과 서기관들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가르치던 자들이었으며, 그리스도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들은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죽였다. 그들은 예수님에게『네가 그리스도냐』라고 물었다. 예수님이『구약성경이 증거하는 것이 나에 대해서 증거하는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말한 것처럼 바리새인들은 구약성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하는데, 과연 하나님을 잘 알고 있느냐 라는 것이다.
사도행전 18장 27-28절에서『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함으로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를 써 영접하라 하였더니 그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이러라』아볼로는 구약성경을 가지고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그 아볼로의 영향으로 에베소 교회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사도바울이 이 교회에 편지를 하는 것이다.『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하나님을 알게되는 것은 지혜와 계시의 영을 통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출애굽한 히브리 백성들은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권능을 알았다. 열가지 재앙을 통하여, 어린양의 피를 칠하여 장자의 죽음을 피하고, 홍해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면서도 황금으로 된 소 우상을 만들어 절했다. 가나안 땅 앞에서는 아낙자손이 두려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들어가면 죽는다』라고 믿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것이다.
오늘날도 지혜와 계시의 영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면, 삶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의 삶은 어떤가? 오늘날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을 안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결과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세상의 성공과 행복과 건강을 책임져 줄 신으로 생각한다면, 시내산에서 황금 송아지에게 절하는 히브리 백성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것이나, 시내산에서 백성들이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절하는 모습이나,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나, 오늘날 교회에서 기복신앙에 사로잡혀서 하나님께 기도 간구하는 모습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 속에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심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영적 눈이 감겨져 있는 모습이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하나님을 안다면, 회개하여 믿고 순종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회개없는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호세아는 6장 2-3절에서『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주님을 힘써 알라는 것이다. 주님을 아는 것은 회개와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신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 안다고 말하지만,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려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면서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영적인 눈에 밝아지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아서 영적인 눈이 뜨지는 것이다. 육의 것이 예수의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육의 눈에 반응하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이『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산다』고 말씀했는데, 백성들은『들어가면 죽는다』라고 반응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백성들은 육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오늘날도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오직『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야만 하나님을 알게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는다면 아무도 하나님을 아는 자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십자가 이후에는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으면 아무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하나님께로 다가갈 수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은 예수님과 연합된다는 것이다. 세상을 사랑하는 탐심을 못박고, 죄에 대해서 못박히는 것이다.
예수님은 탕자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탕자의 아버지는 방주 안으로 들어오는 자의 하나님이 되신다. 방주는 회개하는 자만 들어갈 수 있었다. 노아가 120년을 외쳐도 가족 7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들어가지 않았다. 구원은 성경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행하는 자가 구원받는다. 성경에서 거듭나는 몸이 분명히 있다고 말하지만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 마음의 것으로 이해한다.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자신의 현실적 몸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다시 태어나는 몸은 하나님나라에서 장막이나 처소로도 비유를 한다. 죽어서 그런 상태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연합된 자가 현재적으로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신다. 예수와 함께 못박히는 자가 현재적으로 우리의 장막이 무너지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5장 1-10절에서 사도바울이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2-3절에서는『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벗은 자들은 새로 태어난 영의 몸을 입지 않은 자라고 할 수 있다. 거듭나지 않은 자들은 다 벗은 자라는 말씀이다. 오직 예수와 함께 못박힌 자들만 계시의 영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육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아무리 가나안을 외쳐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오늘날의 방주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한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노아가 120년을 아무리 외쳐도 들어가는 자가 고작 가족 7명이었다. 회개하여 거듭난 자만이 방주 안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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