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시작은 회개뿐이다
마태복음 5장 1-5절『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예수님이 병을 고친다는 소식에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런데 산에 올라가니 제자들만 나아왔다. 심령이라는 말은 영이다. 영이 가난하다는 말은 애굽에 갇혀있던 자들의 깨달음이다. 베드로전서 1장 23-25절에서『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이사야서에서 세례요한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다. 영이 가난한 자들은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는 자들이다.
이사야서 40장 5-8절에서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복음의 시작은 인생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허무함을 깨닫는데서 출발한다.
오늘날 복음은『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방주에 들어간 자에게 해당하는 말이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뜻이다. 방주에 들어가지 않은 자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존재는 존귀한 자가 있으며, 존귀하지 못한 존재가 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만 하나님이 존귀하게 여기신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영으로 가난한 자다.
『가난하다』는 말은 말씀으로 인하여 애통해 하는 것이다. 자신이 주인인 자는 애통해 하지 않는다. 영적인 체험을 해도 자기를 위해 이용하게 된다. 베드로는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는 예수님을 보게된다. 그래서 내려가지 말고 초막집을 짓고 살자는 것이다. 예수님은 삼년이 지나서 온갖 기적을 경험한 제자들에게『오늘밤 다 나를 버리리라』라고 말씀하셨다. 특히 베드로에게는『돌이킨 후에 형제들을 굳게하라』고 말씀하셨다. 돌이킨 자가 예수님의 생명으로 들어가는 자가 된다.『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진노의 자식이구나』를 깨닫는 자가 돌이키는 자가 된다. 이것을 깨닫는 자가 영으로 가난한 자다. 그래서 돌이키는 자가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연합될 수 있다.
영으로 가난한 자는 디모데전서 6장 7절에서『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를 깨닫는 자다. 이게 복음의 시작이다. 세상에 사는 것이 허무한 인생임을 깨닫는 자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자가 된다. 그래서 갇혀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애통하게 된다. 그 다음에『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땅은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를 말한다. 출애굽한 백성에게는 가나안에 들어가는 믿음이다. 영이 가난한 자만이 출애굽하듯이 세상을 나오게 된다.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된다. 이 세상이 영을 괴롭히고 죽이게 하는 곳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영을 괴롭히고 죽이는 모든 것이 죄악이라는 것이다. 온유한 자는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믿음을 갖는 자가 된다. 여기에 이르지 못한다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시편 34편 18-19절에서『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마음이 상한 것이 영이 가난한 자다. 시편 51편에서 선지자 나단이 밧세바를 범한 다윗에게 당신이 바로『그 자니라』라고 말했다. 16-17절에서는 다윗이 자신의 상한 영을 말한다.『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여기에서도 심령은 영이다.
영이 가난하고 애통하지 않으면, 구원에 들어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7장 10-12절에서『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를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를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여기에서 강조하는 것은『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회개하는 자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거듭날 수 없다. 마가복음 4장 12절에서는『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아무리 성경 말씀으로 회개하라고 해도 회개하지 않으면, 이런 상태라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오히려 깨닫지 못하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회개는 하나님께 방향을 돌이키는 것이다. 교회 생활을 오래하고, 감동적인 설교를 듣고 해도 돌이키지 않으면, 회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엇에서 돌이키라는 것인가? 자기라는 존재에서 돌이키라는 것이다.『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자기를 못박혀』라는 것이다. 자기가 너무 좋게 여겨진다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힐 수가 없게 될 것이다. 애통하는 자가 아니면 못박힐 수 없다. 자신이 애통하는 자가 되지 않으면 방주에 들어가지 않는 자가 된다. 애통하는 자가 되지 않으면, 돌이키는 자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이 죄사함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사도행전 3장 19절에서『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회개하고, 돌이켜, 그래서 죄사함을 받게된다.『돌이켜』라는 말은『거듭난다』는 말이다. 과거 우리말 성경에『돌이켜』라는 말을 회심으로 번역한 적이 있는데, 원래는 회개가 회심이라는 뜻이다. 회개라 (悔改)는 우리말이『돌이키는 의미』를 아주 애매모호하게 만들었다. 한자를 보면 마치 마음의 상태를 개선하는 듯한 모습이다. 회개는 개선이 아니라, 이전의 것을 버리고, 새롭게 되는 것을 말한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