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
갈라디아서 3장 29절『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그리스도의 것이 되어야 구원받는다.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소유가 된다는 말이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의 것이 되어야만 구원받는다.
회개하여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것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자기를 부인해야만 그리스도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이 회개하는 자를 피값으로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것이 되면 약속대로 유업을 이루게 하시고, 믿음의 선물을 주신다.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거듭난 자에게 주시는 것으로, 교회 나가서『예수를 믿겠다』는 그런 믿음이 아니다. 믿음의 선물은 계시되는 믿음이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22절에서『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라고 했다. 계시될 믿음이 오기 전에는 율법이라는 그물에 걸려서 그리스도에게로 갈 수 없는 것이다.
계시될 믿음이 와야만 율법이라는 그물망에서 풀려날 수 있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율법을 말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죄인들이 그물에 갇혀있다고 할 때, 그물로 부터 나오는 방법은 그물의 주인이 그물을 풀어줄 때다. 스스로는 빠져나올 수 없다. 그물에 갇혀있는 자는 내가 왜 이 그물에 갇혀있는가를 생각하고 이렇게 죽을 자라는 것을 고백하고 죽은 자 같이 될 때 풀어주는 것이다. 죽은 자가 같이 되지 않으면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 율법의 그물망이다.
그물이 죄인을 가두는 수단이지만 그물을 통해서 죄인됨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율법이다. 갈라디아서 3장 24절『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하나님의 빛이 비춰져서 인간의 상태가 어떠한지 드러나는 것이 은혜다. 율법 아래 매여있다는 것은 로마서에 의하면『인간은 모두 육신에 따라 사형죄와 같이 살고 있는 모습』이다. 육신을 따라 살던지 성령을 따라 살던지 중간의 모습은 없다.
『뜨겁든지 차겁든지 해야지 미지근한 것은 안된다』고 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의 삶 속에는 그리스도가 계시된다. 요셉과 욥의 사례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어떻게 계시되는가를 보아왔다. 그리스도가 계시되는 삶은 자기를 낮추는 것,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계시되는 자만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 계시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은 인간적인 육의 마음으로는 불가능하다. 밤낮으로 눈물흘리며 회개하지만,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면 결국 다 자기를 위하는 눈물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이다. 정과 욕심은 자기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과 욕심은 자기가 좋은 사람들만 사랑하고, 싫은 사람은 배척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 당을 짓는다. 우리 몸은 수없이 많은 세포로 이루어져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런데 어느 한 세포가 다른 세포를 공격한다면 그 사람의 몸은 망가지고 말 것이다. 그 공격하는 세포를 암세포라고 한다. 암세포를 제거해야만 그 사람이 살 것이다.
니골라는 일곱 집사에 뽑히고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니골라가 당을 지었다. 왜냐하면 육신을 따라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육으로 살면, 사람들도 서로 간에 정을 나누지만 그 정은 적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모든 삶은 육으로 사는 사람들이고, 자기를 위해서 사는 자들이다. 오직 회개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자만 주를 바라보는 자들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자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 속에 주인이 예수인가 자기인가의 차이다. 회개하지 않은 자는 자기를 위해서 사는 자가 될 것이다. 회개하지 않은 자는 어려움이 오면 하나님 말씀이 들어오지 않게된다. 그래서 어떤 상황이 도래하면 두 종류로 나뉘게된다. 회개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자만 주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주를 믿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아멘을 외치지만『자기를 부인하는 자』인지를 점검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할 수 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사람들의 믿음과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믿음은 서로 연결되지 않게된다. 그래서『주여 주여』하지만 주님은『나는 너를 모른다』라고 하실 것이다. 구원받는 믿음은 주님이 인정할 때 얻게되는 믿음이다. 주님으로 부터 오시는 것이다. 이 믿음이 오는 것은 육신적 자아가 죽은 자 같이 될 때 오는 것이다. 율법의 그물망 안에서 죄인이 죽은 것 같이 될 때, 율법으로 부터 해방되는 믿음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왜 수십년의 교회생활 속에서도 이런 것을 깨닫지 못하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계시, 즉 죽음의 언약 속으로 들어가는 계시를 모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현재적 상황에서 육의 마음을 포기하기 싫어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하나님에 대한 나의 악한 모습을 발견해야만 살 수 있다. 교회생활, 기도, 찬양, 봉사 등 모든 종교활동이 지금의 나의 모습을 가리게 할 수 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있는가?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지금 현재 율법에 매여 있는지, 아니면 율법이 그리스도의 계시 속으로 인도하고 있는지 살펴 보아야만 한다. 율법에 매여있는 자들은 자기가 주체가 되어 육의 삶을 사는 자들이다. 율법이 그리스도의 계시로 인도하는 자들은 율법의 거울을 통해서 『자기라는 악』을 발견하고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들어가는 자다.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셔서 하늘의 빛을 비춰주시고, 그리스도의 계시를 깨달아야만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계시를 깨닫는 자만이 약속대로 유업을 잇게 된다.
예수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부터 그리스도의 계시가 되어 자기를 부인하는 자만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를 부인하는 자에게 믿음이 오기 때문이다. 믿음이 오기 전에는 율법 아래 매인 바 된 것이다. 믿음이 오기 전에는 율법은 간수와 같은 것이다. 율법이 회개하여 자기를 부인하는 자에게는 간수가 아니라, 초등교사가 되어 가르쳐준다. 무엇을 가르쳐주는가? 사형당할 죄인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회개하여 예수와 함께 죽으라고 가르쳐주는 것이다.
율법이 간수가 될 때는 여전히 사형당할 죄인이 되지만, 율법이 선생이 되어서 회개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자에게는 죄인으로 여기지 않고, 감옥을 빠져나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렇게 감옥으로 부터 빠져나갈 때 하나님으로 부터 용서받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와 연합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이 결코 용서하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노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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