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고린도후서 9장 1-15절)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나니 이는 내가 너희의 원함을 앎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마게도냐인들에게 아가야에서는 일 년 전부터 준비하였다는 것을 자랑하였는데 과연 너희의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을 분발하게 하였느니라 그런데 이 형제들을 보낸 것은 이 일에 너희를 위한 우리의 자랑이 헛되지 않고 . . . . . . .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그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로 말미암아 넘쳤느니라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그들과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또 그들이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를 사모하느니라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바울이 고린도교회가 받은 은혜만큼 연보를 미리 준비하여 교회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라고 하였다. 헌금과 연보에 대해서 정확하게 잘 알아야만 한다. 예수님이 부자들과 과부가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고 말씀을 하셨다. 그런데, 과부가 훨씬 많이 헌금을 했다는 것이다. 구약시대의 헌금과 신약시대의 헌금은 의미가 다르다. 어떤 교회에서는『구약시대의 십일조가 신약시대는 연보로 바뀌었다』고 말하는 목사들도 있다. 예수님은 헌금이라고 했는데, 목사들은 연보라고 한다.
연보라는 말은 구약시대에서 사용되었으며, 연보궤는 구약시대에서는 보물창고, 국고창고의 개념이다. 히브리어는 리시카, 헬라어는 가조필라케오로 번역되었으며, 하나님의 성전 뜰에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 창고를 말하는 것이다. 신약시대 교회에 작은 헌금통이 아니라는 것이다. 역대하 34장 9-10, 14절에서 연보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연보궤 안에는 온갖 십일조와 헌물들이 있었던 창고였던 것이다. 히브리어의 보는『들어오다』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예물창고에 들어온 모든 것이 연보라는 것이다. 구약시대의 십일조도 연보궤에 들어있는 것 중의 일부였다. 그러니까『구약의 십일조가 신약의 연보로 바뀌었다』고 말하는 것은 곤란하다.
신약시대에서 연보라는 말은 구약시대의 개념과는 다르다. 구약시대는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십일조와 헌물들을 연보궤에 모아둔 것이다. 하나님께 드려서 그 예물을 하나님 성전 맡은 자(레위지파)와 고아와 과부를 위해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에서 처음 사용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연보라는 말을 사용하시지 않고 헌금이라고 했다. 예물은 히브리어는 고르반, 민하로 사용되었다. 사도바울은 전도를 할 때, 자비량으로 생계를 꾸렸다. 신약시대에서 헌금으로 생활비를 준다든가, 가난한 자와 과부를 도운 것이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헬라어『도론』이라는 말은 헌금으로 번역된 것이다. 헌금이라는 말도 예물이라는 의미가 많이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헌금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는데, 4장 32-37절을 보면 모든 무리들이 자기 재산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 왜 그렇게 했는가? 이스라엘 사람들의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희년이 되면 다 돌려주어야 하는데, 이 때 당시에 초대교회 제자들의 생각(추정)은 예수님이『곧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했는데, 종말이 가까워진 것으로 생각하니 땅을 다 바쳐 사도들에게 바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와중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전 재산을 팔아서 바치겠다(히브리어:고르반)고 했는데, 아까운 마음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일부를 감추었다(횡령)라고 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어버린 것이다. 하나님을 속인 것이다.
하나님이 여리고 성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붙였는데, 여리고 성에서 취한 전쟁 포획물을 개인이 가지지 말라고 한 것이다. 이 것이 하나님께 바쳐지고, 불태워지는 것이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은 다 소멸되어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여리고성 전투에서 아간이 훔친 행위는 그 결과가 아간도 노획물과 같이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 되어, 결국 아간도 하나님께 멸하여져야 되므로 아간의 가족들이 다 죽게 된 것이다. 헌금은 형편과 분수에 맞게 성의껏 기쁜 마음으로 내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연보는 고린도후서 9장 5절에서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라고 했다. 사도바울은『하나님이 주시는 참 복을 준비하라』는 말씀이다. 이는 말라기 3장 10절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열고 주시겠다고 하는 하늘의 복, 에베소서 1장 3절에서 말하는『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 다 같은 말이다. 즉 내가 연보를 내므로 이 돈이 다른 사람에게 하늘의 신령한 복이 될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 내는 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말하는 연보인 것이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연보의 첫 번째 의미는 축복을 의미한다.
두번째는 로비아로서 성금 또는 기부금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서 내는 연보이다. 세번째는 하플로테스(순전, 정직)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복을 나누어주는 마음으로 내라는 뜻이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연보는 하나님에게 바치는 그런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내는 연보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말로 연보라고 번역했지만, 사실상 성금에 해당하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연보한 것을 가지고 예루살렘교회에 가기로 하였다.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를 고린도교회가 이미 일 년 전부터 예비하였다고 자랑하였다. 그러므로 파송 자들이 도착하기 전에 미리 헌금을 준비하였다가 큰 낭패가 되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헌금을 즐겨 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본서를 기록하면서 하나님은 억지로 내는 것보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헌금을 바라심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헌금은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다. 8장1-2절에 의하면 마게도냐의 성도들은 많은 환란과 극한 가난 속에서도 힘에 벅차도록 자원함으로 행한 그들의 사랑과 헌신의 연보는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당시 사람들은 기독교를 믿는다는 사실 때문에 유대인들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있을 때였다. 그들은 피식민지 백성으로 받는 시련 중에도 현실을 초월한 기쁨이 항상 내재해 있었다. 그 기쁨은 모든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되었고, 그 힘은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이었다. 그들에게는 절대적 가난이 닥쳐왔지만 오히려 연보가 많았다는 것이 역시 하나님의 은혜라고 바울은 전하고 있다.
마게도냐의 교인들은 시련을 당할수록 오히려 넘치는 기쁨을 누렸다는 것은 그들의 신앙이 매우 성숙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시 마게도냐는 지역적으로는 부요했으나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음으로 모든 수입원들을 로마인들에게 빼앗겨 구조적인 가난을 겪고 있었다. 마게도냐 지역은 농업, 광업, 목재 산업 등이 번성하였기 때문에 지역 자체는 부요했다. 그러나 마게도냐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극한 가난은 믿는다는 것 때문에 가해진 박해의 결과로 보고 있다. 바울은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마게도냐의 교인들은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였다는 것을 하나님사랑의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연보는 소박, 단순, 순수함이라는 뜻으로 헌금의 기본적인 태도는 마음의 순수함에서 비롯되어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바울은 가난이라는 상황이 인색함의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됨을 말해준다. 마게도냐인들은 극한 가난 속에서도 자기들이 드릴 수 있는 모든 것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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