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에베소서 4장 22-32절)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유혹은 속이는 것(deception)이다. 옛사람과 새사람은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옛사람을 벗어버리면 주님이 새사람을 입혀주신다.『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에서 옛 성경을 보면『너희가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라고 되어있다.『심령』이라는 말은『생각의 영』이라는 표현이다. 영어로는 niv와 kjv가 차이가 있다.『in the attitude of your minds』(niv)『in the spirit of your mind』(kjv), attitude 가 아니라 spirit 다. 그리고 우리말 성경에는 spirit이 혼과 영으로 섞여 해석된 경우도 있으며, mind도 마음과 생각이라는 표현으로 섞여있다. 이 mind는 생각이라는 단어다. 마음은 heart로 표현한다. 너희의 생각의 영으로 새롭게 되어 24절에서『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는 것이다. 이게 거듭남이다.
이 말씀을 전후로 에베소서 5장 6-9절에서『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어둠의 자녀가 옛사람이고 빛의 자녀가 새사람이다. 중간은 없다. 옛사람이 노력하여 새사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옛사람은 죽어야만 한다. 어둠이 노력하여 빛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은 사라져야만 한다. 오늘날 대부분 사람들은 중간으로 생각한다. 옛사람을 벗지 않고 온갖 노력을 통하여 새사람으로 전환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구약성경은 신약의 그림자다. 출애굽을 할 때 사람이 건널 수 없는 홍해바다를 건넌다. 그리고 광야가 나타난다. 광야에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간다.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들어가는 자를 언약으로 말미암아 영접하는 것이다. 홍해를 건너는 것은 세상을 나오는 것이다. 세상을 나오는 것이 네가지 밭의 비유다. 길가밭(하나님 말씀을 마귀가 가져감), 돌짝밭(말씀으로 시험받아 말씀을 버리는 것), 가시떨기 밭(말씀의 씨가 자라지 못함)
그래서 자기부인의 회개없이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세가지 밭의 유형에 속하는 것이다. 믿은 후에 회개할 수 있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돌짝밭과 같이 베드로도 삼년동안 예수를 믿었지만, 단 하루에 이런 믿음은 무너지고 만다. 베드로는 인간들 중에 기적을 가장 많이 경험한 사람이었다. 계시가 있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도 믿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고, 모세와 엘리야를 이 땅에서 직접봤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늘밤 너희들은 다 나를 버리리라 이게 복음이다.『모든 사람들이 이런 상태를 깨달아라』고 말하는 것이 복음이다. 깨닫는 자는 좋은 소식이 된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이 죽는다는 말씀에 반응하는 자가 단 한명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늘날도 예수와 함께 죽어야 한다는 말에 얼마나 반응할지 아무도 모른다. 예수님이 베다니 문둥병자 시몬의 집에 있을 때, 한 여자가 와서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 그 때 예수님이『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를 기념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여자가 눈물로 나의 장사를 준비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이 이 여자의 생각에 들어왔다. 생각에 들어오므로 행동이 나온 것이다. 베드로는『이들은 다 버려도 나는 절대 버리지 않습니다』라고 힘주어 강조했지만, 그날 밤 세번이나 부인했다.
복음은 인간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알려주는 소식이다. 우리가 행복하고 성공했다 할지라도 인간이 쌓은 모든 것이 죽음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예수없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신다. 예수가 있는가 없는가의 차이는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연합되는가 아닌가의 차이다. 내가 죽을 죄인임을 아는 자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연합될 수 없다. 연합될 수도 없으며, 하려고 하지도 않는 것이다. 단 하나『나는 주님이 보시기에 죽은 자구나,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자구나』라고 깨닫는 자가 못박하신 예수와 연합될 수 있다.『어떠한 노력으로도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구나』를 깨달을 때, 자기를 부인하는 회개가 나올 수 있다.
오늘날 대부분은 자신의 전적타락을 외면한채 예수님을 소망한다는 것이다. 찬송가에서『할 수 있다 하시는 주 하나님』을 부르면서 주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식이다. 십자가를 붙잡지 못하는 회개없는 믿음은 구원이 아니다. 회개없는 믿음은『오늘밤 다 나를 버리리라』와 같은 것이다.
누가복음 22장 31절에서『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라고 말씀하신다. 긍휼이시다. 그리고 32절에서『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말씀하셨다.『거듭나라』는 말씀이다. 열두제자를 통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은 모든 인간이 전적타락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힘으로는 아무도 십자가의 주님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게『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전에는 옛사람이었다. 우리는 노아처럼 이 말을 전해야만 한다. 『모든 사람이 전적타락이며, 회개해야만 살 수 있다』고 전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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