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베드로전서 3장 13-22절)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에 대해 말하고 있다. 베드로는 고난 앞에 마치 거북이가 온몸을 움츠리고 견뎌내는 소극적 대응을 넘어, 고난을 주는 숱한 악에 맞서 선을 행하라는 적극적 권면을 아끼지 않았다. 『또 너희가 열심히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베드로 사도의 말처럼, 열심히 선을 행하면 누구든 성도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세상을 향하여 선을 행하는 성도에게 세상은 결코 선으로 갚지 않고, 도리어 악으로 갚는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연약한 동물의 생명이 강한 동물에게 희생되듯, 세상은 선을 행하는 성도를 죽음의 문턱까지 내몬다. 그럼에도 성도가 선을 행하고, 고난을 참아야 할 이유는『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성도란 자신의 주도권을 모두 하나님께 드린 사람이다.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렸으므로, 다시는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인 선을 적극적으로 펼치다가 받는 저항과 고단함은 하나님께서 모두 헤아려주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악인에게 찾아오는 고난은 성격이 다르다. 그들이 겪는 고난은 궁극적인 고난,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한다. 성도의 고난은 하나님께서 헤아려주시지만, 악인의 고난은 하나님의 심판이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말하는 것이다. 악을 행하는 이를 심판하시고, 선을 행하는 이들에게 복과 상을 주시는 분임을 믿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베드로가 그런 믿음을 지닌 것은 아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면 멱살을 잡고 항변했고, 예수님을 포박하러 온 사람들을 향해, 칼을 빼앗아 사람을 내리친 그였다. 닭이 세 번 울기 전, 그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지만, 결국 베드로는 무참히 무너졌다. 하지만 주님은 무너진 그를 새롭게 세워주셨다. 성도는 심판자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손길이 필요한 죄인에 불과하다. 죄인인 우리가 선을 행할 수 있는 이유를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주님은 선을 행함에 있어 주저함이 없으셨다. 하나님을 신뢰했고, 하나님의 뜻, 더 많은 이들을 하나님께 인도하기 위함임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그분의 죽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게 되었고, 거듭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편 119:71)
오늘날 우리에게 말씀을 적용해 보면, 우리의 인생에 평안이 없는 이유는 사랑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의가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도베드로는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음을 지적하고, 이는 노아시대 살았더라면 죽었어야 할 그런 자라는 것이다. 너희가 바로 노아시대 그들이라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하는 것이다.『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오늘날에도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노아시대 홍수로 죽은 자가 되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는 사랑의 하나님이 대세다. 탕자가 돌아 오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다. 회개없이 사랑의 하나님만 강조하는 기독교는 잘못된 것이다. 노아는 당대 의인이라고 했다. 노아는 주님의 사랑을 전파한 것이 아니라 의를 전파한 것이다. 우리도 주님의 나라와 의를 전파해야 한다. 의가 없으면 평안함도 없다. 손해를 보더라도 의를 지켜야 한다. 노아 때나 오늘날의 시대나 죄악은 마찬가지 일 것이다. 하나님이 없는 인간에게는 그 때나 지금이나 같다는 말이다. 아담이 범죄한 후 아담의 가정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형이 동생을 예배로 인하여 죽이는 사건이다. 죄는 즉시 문 앞에 엎드리고 있다. 가인이 살인을 본적이 없는데도 아벨을 죽였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의를 전파하도록 하셨다. 엄격히 말하자면 의가 있는 곳에는 사랑이 함께 한다. 의와 사랑은 분리될 수 없다. 즉 의가 없는 사랑은 거짓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랑만을 말한다면 바로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아야 진정한 회개가 나올 수 있다. 하나님은 불의하지 않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백이십 년간의 기간을 주신 것이다. 이 기간에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이 전파되었을 것이다. 노아의 부모와 형제들도 듣지 않는데, 많은 사람들이 노아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마귀에게 속았던 것이다. 그리고 백이십년이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었지만, 방주에는 노아와 식구 8명만 들어가게 된 것이다.『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자는 멸망하는 짐승과 같도다』이 말은 시편에서 다윗이 말했으나 노아 때를 말한 것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가치만을 생각한다.『나는 존귀하신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한다. 곧 불 심판이 올 것이다. 왜냐하면 노아의 시대 만큼이나 악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각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다.
사람들은 노아가 하나님의 의를 전파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많았다. 그 당시의 세상은 지금 보다 훨씬 아름다웠을 것이다. 그런데 방주는 컴컴했던 것이다. 노아의 방주 안에는 흑암이었다. 모든 사람들은 의의 전파자를 따르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창조된 아름다운 곳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다. 내 식구의 성공, 아름다운 우리 집, 행복한 상황, 그 곳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것이다. 마귀가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속이고 있다. 사단은 속이는 자이다. 노아의 당시 부모와 형제들도 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을 것이다.『하나님이 아름다운 자연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렇게 행복한 가정을 주심을 감사합니다』라고 예배했을 것이다. 그런데 노아는 『백이십년이 차면 다 망하리라』라고 외쳤다.『하나님이 진노하신다』라고 외치면서 시컴한 방주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방주 만이 유일한 사랑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전제가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드리는 사람에게만 방주가 사랑으로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은 진노하신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이 십자가는 하나님의 진노이신 것이다. 방주에 들어가는 자만 살아남았듯이, 십자가와 연합되는 자만 구원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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