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

(고린도후서 12장 11-21절)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나는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내 자신이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한 일밖에 다른 교회보다 부족하게 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 너희는 나의 이 공평하지 못한 것을 용서하라 보라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준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내가 구하는 것은 너희의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사용하고 또 내 자신까지도 내어 주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사랑을 덜 받겠느냐 하여간 어떤 이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교활한 자가 되어 너희를 속임수로 취하였다 하니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 너희는 이 때까지 우리가 자기 변명을 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 내가 갈 때에 너희를 내가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너희가 원하지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하며 또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비방과 수군거림과 거만함과 혼란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 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하지 아니함 때문에 슬퍼할까 두려워하노라 

 
바울의 진정성은 고린도교회 교인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하였다. 그의 진정성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것, 또 고린도교회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자신을 변론하는 그의 변론은 그만큼 크나큰 마음의 고통을 동반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바울은 단지 자신의 억울함을 자기변명과 항변으로만 풀어내고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이 어리석은 변론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고린도교회를 향한 애절한 사랑의 고백이 되고 말았다. 

어리석은 변론, 어리석은 자랑을 부득불 시작한 바울은 다시 한 번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자신이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사도직의 표를 고린도교회에서 행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이라고 말한다. 표적과 기사와 능력은 각각 별개의 것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초월적 역사가 나타나는 모습을 서로 다른 측면에서 일컫는 것이다. 기사는 기적이 나타나는 것을, 능력은 그 기적의 근원을, 그리고 표적은 그 기적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린도교인들은 바울이 자기들과 함께 있을 때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음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초자연적인 기사와 능력 외에 바울은 한 가지 더 사도됨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모든 참음이었다. 모든 참음은 역경들을 묵묵히 견뎌내는 힘이요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고자 하는 마음으로써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내적인 은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참음은 초월적인 능력과 기사 못지않게 바울의 사도됨을 분명히 보여주는 표시가 되었다.

고린도교회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고린도교회를 향한 바울의 진정한 마음을 저버렸지만 바울은 끝까지 그들을 향한 마음을 포기하지 않다. 바울은 다시 세 번째로 고린도교회를 방문하고자 했다. 또한 자신의 자비량 사역 역시 계속할 것을 밝힌다. 왜냐하면 자비량 사역은 자신의 진정한 관심이 재물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 교인들 자체에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것이 무익한 줄 알았지만 자기 자신을 변호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었다. 그 이유는 끝까지 고린도교회를 포기하지 않는 아버지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세번째 고린도교회 방문을 준비하고 있는 자신을 향해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재산을 갈취하려 한다는 소문에 맞서 자신은 결코 성도들이 재산이나 소유에는 아무 관심이 없고 오직 성도들의 영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다고 말하면서 부모가 자식을 위해 돈을 모아 저축을 하듯 영적으로 미성숙한 고린도교회를 위해 자신은 무보수로 사역하며 바울이 가진 모든 소유와 그의 모든 것을 온전히 희생하며 그들을 사랑하는데 어찌 바울 자신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것이다. 

고린도교회 안에서 바울이 성도들을 속여 헌금을 빙자하여 그들의 재산을 갈취한다는 헛소문을 퍼트리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파송한 디도와 다른 두 형제가 그러한 행동을 한 것이 있느냐고 물으면서 그들이 물질에 대해 깨끗하게 행함과 같이 자신도 깨끗하게 행하였다고 말하는 것을 보며, 하나님의 선한 사역을 감당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의심하거나 불편함이 없도록 또 어떤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항상 깨끗하고 투명하게 사역에 대한 재정을 잘 다스리는 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바울의 이러한 고백은 결코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 앞에 하는 말이며 이렇게 무보수로 봉사하는 것은 오직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며 행여라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방문했을 때 여전히 교회 안의 분쟁과 시기와 중상모략과 교만과 혼란으로 인해 미성숙한 모습을 바울이 보지는 않을까 또 이로 인해 바울이 원치않는 징계를 행함으로 부끄럽고 송구해질까 염려된다고 하면서, 한편으로는 또 성적 쾌락과 음란으로 인해 범죄하고도 회개치 않는 자들로 인해 슬픔거리가 될까봐 염려스럽다고 말했다.

교회는 돈에서 자유로워 질 수 없는가? 교회는 돈에 대해서 어떤 마음으로 대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가 대형화되고, 조직화될수록 더 많은 재정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신도로부터 돈에 대한 압박이 직간접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직접적인 압박은 십일조에 대한 것이다. 십일조는 엄연히 율법적인 것인데도, 신약시대도 마치 하나님이 의무적으로 교회에 바치도록 한 것은 십일조 속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십일조의 궁극적인 의미는 그리스도를 기다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십일조를 내면서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모습이다. 

마태복음 23장 23절에서 예수님이『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바리새인, 서기관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과거시제로 말을 하고 있는 것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한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아주 작은 소득이 있는 것을 정성스럽게 십일조로 드리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정성스럽게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참 좋다 라는 것이다. 그렇게 십일조를 드렸는데, 정작 율법에서 정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에 의해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잘 한 일인데, 율법 속에 담겨진 의와 인과 신은 버렸다고 지적을 하는 것이다. 율법은 행하면서 율법이 나타내고자 하는 좋은 일을 봐야하는데, 율법이 말해주는 장차 오는 좋은 일은 버렸다는 말이다. 그런 것을 버렸으니까 이제 앞으로는 율법도 잘 지키고, 의와 인과 신도 버리지 말아라 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잘 지켰으나 의와 인과 신은 버렸는데, 결국 십일조를 낼 때 의와 인과 신도 버리지 말았어야 되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앞으로 이렇게 살아라 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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