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로마서 7장 4절『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디아 투 소마토스 투 크리스투)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에다나토데테) 이는 다른(헤테로)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히나 카르포포레소멘 토 데오)』


에다나토데테(ἐθανατώθητε)는 아오리스트 시제로서 수동태이다. 이것은 성도가 율법에 대해서 순간적으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의 노력이 아닌 순간적으로 죽임을 당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디아 투 소마토스 투 크리스투(διὰ τοῦ σώματος τοῦ Χριστοῦ)에서 디아는 ~을 통하여 라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그 몸을 통하여 라는 의미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그 십자가의 사건에 동참해야 구원받는 것이다. 그래서 ~통하여 라는 말을 사용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몸은 2000년 전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소유한 성도의 그 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된 성도는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드린 몸이다. 바울이『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라고 말한 것은 성령으로 거듭나는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으며 그 때 율법에 대해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바울는 율법에 대해서 죽임을 당해야 하는 이유는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신 이에게 가기 위함이라고 말을 한다. 함께 살던 남편인 율법에 대해서 죽어야 다른 남편인 그리스도에게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헤테로(ἑτέρῳ)는 완전히 다른 것을 의미한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법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율법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죄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성령의 법은 하나님과 친밀하게 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히나 카르포포레소멘 토 데오(ἵνα καρποφορήσωμεν τῷ θεῷ)는 그 결과 하나님에게 우리가 열매맺는다 라는 말인데, 하나님과 끊어진 관계가 다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성도가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도록 하기 위한 화목제물인 것이다. 그래서 성도가 그 화목제물에 연합 동참하는 것이다.


로마서 7장 5-6절『우리가 육신(테 사르키)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에이스 토 카르포레사이 토 다나토)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카테르게네멘)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둘류에인 헤마스 엔 카이노데티 프뉴마토스)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테 사르키(τῇ σαρκί)는 그 육신이다. 성도가 그 육신 안에 있기 때문에 죄의 욕망들이 율법을 통해서 인간들의 지체 속에 역사하는 것이다. 율법이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는 통로가 되었다는 말이다. 죄를 짓지 않도록 하려고 주어진 율법이 도리어 인간들이 죄를 짓는 통로로 이용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 육신(테 사르키)때문이라고 말한다.


에이스 토 카르포레사이 토 다나토(εἰς τὸ καρποφορῆσαι τῷ θανάτῳ)는 그 사망과 관련한 열매맺는 것 속으로 들어가면서 라는 의미다. 죄가 율법을 통해서 사람들의 지체 안에서 역사함으로 인해 사람들은 사망의 열매를 맺는다. 사망의 열매는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로 인해 죄 가운데 살다가 죽는 것이다.


카테르게네멘(κατηργήθημεν)은 아오리스트 시제, 수동태로서 우리가 율법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 성령세례를 받은 후에 순간적으로 된 것임을 보여준다.


둘류에인 헤마스 엔 카이노데티 프뉴마토스(δουλεύειν ἡμᾶς ἐν καινότητι πνεύματος)는『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 안에서 섬기고』라는 의미다.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그러나 오늘날 율법의 조문을 여전히 지켜 행해야 하는 자들이 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복음을 믿으면서도 율법의 조문에 빠져있는 자들이 있다는 말이다.


대표적인 것이 십일조이다. 여전히 십일조를 강조하는 목사들이 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는『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반드시 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이것을 잘 내면 하나님이 더 큰 복으로 갚아준다』라고 한다. 또 어떤 교회에서는 십일조는 구약에서 정한 율법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에 십일조를 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을 믿지 않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신약성경에는 십일조에 대해서 설명한 내용이 마태복음에서 23장 23절에서 유일하게 있다. 이 성경 구절을 가지고 예수님이 십일조에 대해서 말씀하셨기 때문에『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았어야 된다』고 말했으므로 십일조를 내야 된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23장 23절에서 예수님이『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바리새인, 서기관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과거시제로 말을 하고 있는 것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한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아주 작은 소득이 있는 것을 정성스럽게 십일조로 드리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정성스럽게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참 좋다 라는 것이다. 그렇게 십일조를 드렸는데, 정작 율법에서 정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에 의해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잘 한 일인데, 율법 속에 담겨진 의와 인과 신은 버렸다고 지적을 하는 것이다. 율법은 행하면서 율법이 나타내고자 하는 좋은 일을 봐야하는데, 율법이 말해주는 장차 오는 좋은 일은 버렸다는 말이다. 그런 것을 버렸으니까 이제 앞으로는 율법도 잘 지키고, 의와 인과 신도 버리지 말아라 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잘 지켰으나 의와 인과 신은 버렸는데, 결국 십일조를 낼 때 의와 인과 신도 버리지 말았어야 되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앞으로 이렇게 살아라 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교회사람들이『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라는 마태복음 23장 23절의 구절을 통해서 구약시대에도 했으니까 신약시대에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말씀은『앞으로 잘 해라』라고 한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의 행위를 지적하는『과거의 시제』라는 것을 반드시 이해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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