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로마서 7장 7-8절『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메 케이토)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에그논)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에퓌디메오)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아포르멘 데 라부사 에 히마르티아 디아 테스 엔톨레스)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여기서 (아포르멘 데 라부사 에 히마르티아 디아 테스 엔톨레스ἀφορμὴν δὲ λαβοῦσα ἡ ἁμαρτία διὰ τῆς ἐντολῆς)는 『그런데, 그 죄가 그 계명을 통하여 기회를 얻은 후에』 라는 의미다.
바울은 자신이 율법주의
교육을 받은 후에 자기 안에 많은 갈망이 생겼다고 말한다. 그런데, 자기
안에 그런 갈망을 넣어준 것이 바로 죄라고 말한다. 죄가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통해서 기회를
얻어 자기 안에 그런 갈망이 생겨나게 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율법주의 교회에서
강조하는 것은 십일조, 주일성수, 교회 봉사, 새벽기도 교회를 성전이라고 부르는 것 등이다. 이런 것들을 지키는
것이 신앙이라고 가르친다.
바울이 율법주의 교육을
받으면서 이런 갈망이 생긴 것이다. 무엇인가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죽은 죄를 살아나게 한다. 하나라도 못지키면 스스로 죄가 되는 것이다. 온 열정을 다해 지키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 멀어지는 것이다. 즉 무엇인가를 지키려고 하는 마음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없애는 것이다.
바울은 율법을 몰랐을
때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고 말한다. 계명을 지키려고 했을 때 자신은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므로
죽었다고 표현했다. 바울은 이런 진실을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깨닫게 된 것이다. 생명 속으로 들어갈 계명이 오히려 바울을 죽음으로 들어가게 만든 것이다.
율법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감추어져 있다. 그런데, 계명에 얽매인 율법주의는
오히려 그 생명을 죽이는 것이 된다. 율법주의 자들은 스스로 종교적인 열정을 가지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율법을 철저히 지킴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일 뿐이다.
율법과 계명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것이다. 바울이 이 율법과 계명을 거룩하다 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 속에 그리스도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율법과 계명 속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의 의미를 깨달아야 하는데, 율법주의자들은
그 의미는 놓치고 오직 그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알지 못한 것이다.
율법과
계명에 대해서 어떻게 백성들이 죄 가운데 빠지게 되었는가를 바리새인 시절 경험을 통해서 밝히는 것이다. 바울은
율법을 철저히 지킴으로서 하나님께 나아가려 했던 자신에게 하나님과의 단절되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은 인간 속에 있는 죄의 죄됨을 더 심하게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죄는
헬라어로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이다. 세상죄를 의미한다기 보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의 마음을 의미한다. 물론
세상죄도 좁은 의미에서 죄이지만, 죄의 근본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심이다. 하마르티아는 표적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한다.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χωρὶς γὰρ νόμου ἁμαρτία νεκρά.』코리스(χωρὶς)는 without과 같은 의미이다. 율법(νόμου)이 없다는 말은 율법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한다. 율법에서 벗어났으므로, 율법으로 적용하고
있던 죄가 없어진 것이다. 즉 처벌할 법이 없어졌으므로,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율법이 있으면, 율법의 거울에 비쳐지는 탐욕이 죄가 되며, 율법에 따라 죄인이 되는
것이다.
로마서
7장 14-15절『우리가 율법은 신령한(프뉴마티코스)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사르키노스)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내가 행하는(카테르가조마이)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앞의 문장은 우리라고 하고, 뒤의 문장은 바울 자신에 대해서
말을 한다. 바울이 율법으로 인해 죄 아래 팔리게 되었다고 말을 하는 것이다.
프뉴마티코스(πνευματικός)는 영적이라는 의미이고, 사르키코스(σάρκινός)는 육적인 의미다. 율법이 영적인 사람들이 지킬 수 있는 것임을 알았지만, 그들 스스로가 육적인 존재임을 알지 못했다는 의미가 된다. 바울
만이 자신이 육적인 존재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주의에서 벗어나게 된다.
오늘날 교회에서 육적인 사람에 속하고 있으면서, 자신은
하나님을 잘 안다고 말을 한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려면 육적인 것은 죽고 영적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하는 것이다.
카테르가조마이(κατεργάζομαι)는 힘써 수고하다 라는 의미이며, 현재시제
중수디포데이다. 날마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그런 수고를 했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함을 보여준다. 바울이 현재시제를 쓴 것은 그런 일이 지금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초대교회 당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할례를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율법을 지키고 있었지만 왜 그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께 합당한지 알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을 통하여 바울을 속였기 때문이다.
바울은 율법이 선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는 죄를 깨닫게 해 주는 기능이 있다고 말을 한다. 그러나 율법으로는 죄를 극복할 수 없다. 그래서 복음이 필요한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도 자신 안에 죄가 머물고 있다고 말했다. 인간의 죄는 율법 준수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적인 행위로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육신적인 힘으로는 절대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선을 행하는 마음은 있지만 그것을 힘써 수고해서 이룰 능력은 없다는 것이다.
바울이 예수믿고 사도가 된 현재상태(현재시제)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한다고 했다. 영의
마음으로 하지 않고, 육의 마음으로 행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바울의 마음 속에 두 마음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성도 역시 거듭났어도 이렇게 옛사람이 죽었어도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죽는다는 말은 자신의 정체성과
상관없는 존재라는 말이다. 그래서 마음 속에 갈등과 전쟁이 생기는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해야만 영적 승리를 이룰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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