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에 처해지는 자들
사형에 처해지는 자들
신명기 21장 18-21절「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은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들을 의미한다. 순종한다는 말은 부모의 말에 무조건 복종하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 행동하는 자를 의미한다. 순종하지 않는다는 말은 부모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한다. 오늘날 하나님 말씀도 좋고 세상의 말도 좋은 사람을 방탕하고 술에 잠긴 자라고 표현되는 것이다. 술에 취하면 이말 했다가 저말 하는 자가 된다.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을 부모는 성문 앞의 재판정으로 데려가 재판을 받게 해야 한다. 그 아들이 진실로 부모에게 반항하였다면 그 결과는 마을 사람들에 의해 돌에 맞아 죽는 것이다.
예수님은 첫사람 아담으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산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에 맞아 죽으신 것과 같은 모양이다. 그는 유대인들로부터 율법에 따라 징계를 받아 신성모독죄로 죽으셨다. 유대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을 벗어나 패역한 아들로 보이는 것이다.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첫사람 아담의 죽음은 죄의 몸에 대해서 죽은 것을 의미한다. 죄의 몸은 악으로서, 아담으로부터 이어져 모든 사람에게 전이했다. 이 죄의 몸이 없어지지 않는 한 인간은 죄의 굴레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첫사람 아담의 죄의 몸에 대해서 죽으셨다. 로마서 6장 6절에서「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신명기 21장 22-23절「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신명기 21장은 시체에 관한 규정을 말하고 있다. 시체가 살해된 것이건 죄를 지어 나무에 매달린 시체이건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피가 흘려지는 일은 땅을 더럽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피에 대한 책임은 공동체가 져야 했다. 그래야 이스라엘 내의 경건과 거룩이 유지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 시체가 있는 장소와 가장 가까운 마을은 그 죽음에 대한 속죄의 규정을 실행한다. 속죄의식을 위해 선택되는 아직 부리지 아니하고 멍에를 메지 아니한 암송아지는 죽음을 덮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암송아지의 죽음은 이스라엘 공동체 내에 피 흘린 죄가 있지 않도록 하는 역할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그림자이기도 하다.
마을 전체가 큰 의식을 행하였고, 죽은 사람을 장사하면서 함께 드리는 기도 속에는 마을 공동체 전원이 전쟁터와 같은 이 땅에서의 삶을 거룩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다짐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신실함을 공유하게 된다. 죄가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 인생에, 이 땅에, 그들의 심령에 머물지 않도록 함께 기도할 수 있는 사람들, 그것이 참 공동체였다. 신앙 공동체는 언제나 외부의 영향으로 소멸되고 와해될 위기에 있기 때문에 신명기는 공동체로 하여금 어떤 타협도 용납하지 말고 절대적인 순결과 순종을 매우 강하게 강조한다.
나무위에 달린 시체에 관한 규정에서 이 형벌은 마을 전체에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한 형벌이었다. 그러나 그 시체를 밤새도록 두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 피가 땅을 더럽히기 때문이다. 복이 머물러야 할 하나님의 선물인 땅, 신앙 공동체가 머물러야 할 복된 삶의 터전에 저주가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죄에 대한 죽음이고, 세상에 대한 죽음이다. 하나님은 죄악의 세상을 심판하듯이 자기의 아들 예수를 저주스럽게 죽도록 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린 자신의 아들에게 분노를 퍼부은 것이다. 예수님의 흘리신 피가 죄악에 빠져있는 세상에 대해서는 저주가 된 것이다.
유대인들 입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을 따라 저주 아래 있는 자가 되었고, 그 저주 아래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예수님은 율법 아래 있는 분이 아닌데, 저주 아래 있게 된 것이다. 바리새인들, 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율법주의를 근거로 판단하고 죄를 정죄한 것이다. 상대방이 율법 아래 있던 아니던 상관없이 인권을 유린했다. 예수님은 율법 아래 있지도 않고, 죄도 없는데, 유대인들이 예수를 율법을 근거로 죄를 뒤집어 씌우고 처형한 것이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도 자신의 아들을 율법 아래 두고 십자가에서 죽게 했다. 같은 목적으로 십자가에서 죽게 했지만,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할 것을 아들을 대신하게 했고, 유대인들은 예수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다. 하나님은 죄없는 아들을 심판하므로 은혜를 베푸시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으로 하나님을 대적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여전히 분노하시지만, 회개하여 돌아오는 자에게 사랑을 베푸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이것은 하나님과 성령이 증언한다. 마태복음 3장 16-17절에서『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하나님은 예수를 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들은 예수를 신성모독죄로 처형한 것이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예수님이 이렇게 율법 아래 죽은 것은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히브리서 9장 28절『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죄 아래 있는 자들이고, 당시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은 하나님 아들을 죽이므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을 자행했는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 희생제사, 곧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죄를 용서하시겠다는 것이다. 이게 대속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그들은 깨닫지도 못하고, 회개하지도 않았다. 대속의 죽음은 비단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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