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주머니에 두 종류의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네 주머니에 두 종류의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신명기 25장 13-16절「너는 네 주머니에 두 종류의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하야) 말 것이며 네 집에 두 종류의 되(에파)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하야) 말 것이요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 이런 일들을 행하는 모든 자, 악을 행하는 모든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하니라」


 


“너는 네 주머니에 두 종류의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 לֹֽא־יִהְיֶ֥ה לְךָ֛ בְּכִֽיסְךָ֖ אֶ֣בֶן וָאָ֑בֶן גְּדֹולָ֖ה וּקְטַנָּֽה׃ ס


 


(로 하야 르카 키스 에벤 에벤 가돌 카탄)


 


로는 부정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형용사이다. 하야는 존재하다, 발생하다 라는 의미를 갖는다. 떨기나무 불꽃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스스로 “하야 아세르 하야”라고 말씀하셨다. 키스는 돈이나 저울추를 넣는 주머니를 의미한다. 에벤은 짓다라는 의미를 통해, 건축하다, 수선하다, 세우다 라는 바나 에서 근원을 찾는다.  돌, 홍옥, 석수 등의 의미를 갖는다. 가돌은 무거운, 큰, 카탄은 가벼운, 작은 의미를 갖는다. 에파는 곡식을 측량하는 단위로 사용되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게를 달 때 돌로 만든 저울추를 사용하였는 바, 이는 동일한 저울추를 사용하지 않는 것을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이다. 즉 부정직한 자들은 서로 같지 않은 두 개의 추를 주머니에 간직하고 있다가, 물건을 살 때에는 큰 추로 무게를 측정하여 정량보다 많은 양을 거두어 들이고, 물건을 팔 때에는 작은 추를 사용하여 정량보다 적은 양을 줌으로써 부당 이득을 취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공정한 상거래를 위해서는 도량기구의 정확성이 요구되었다.


 


레위기 19장 35-36절「너희는 재판할 때나 길이나 무게나 양을 잴 때 불의를 행하지 말고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 나는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 땅에서 나오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네 주머니에 저울 추로 사용하는 돌을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집에 두 종류의 큰 것과 작은 되를 두지 말라는 것이다.


 


주머니나 집은 성전을 의미한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에게 하는 경고의 말씀이다. 백성들이 제물을 가져오면, 성전의 레위인들이 그 제물의 무게를 달고, 부정한 측정 방법으로 하나님께 드렸다. 그 이득은 레위인들이 가져가는 것이다. 하야를 넣다, 두다 라고 번역했는데,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큰 것과 작은 것을 구별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만인에 대해서 공평한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레위인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측정해서, 하나님은 불공편한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기복신앙에 있어서 상급을 말한다. 하나님께 열심히 봉사하고, 노력하고, 헌신하면 마치 하늘의 상급이 더 쌓이는 것처럼 말하는 목사들이 많이 있는데, 그와 같은 이치인 것이다.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성전은 성도의 심령 속의 성전을 의미한다. 이에 성도는 하나님께는 자신을 드리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자신을 드리는 것이다. 옛사람의 죽음은 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이게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완전히 죽음이다. 죽는다는 말은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된 것을 의미한다. 일부만 조금 남겨두고 변화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날 신도들은 성화되는 것을 말한다. 성화란 거듭난 자가 영적으로는 어린아이에서 점차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대부분 신도들은 그렇게 받아드리지 않는다. 신도들 대부분은 성화를 거듭남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거듭남을 마음의 변화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다. 점차 변화되어서 거듭난 존재가 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완전히 하나님께 드린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성화라는 말은 교리에서 지어낸 말이며, 성경에는 거룩이라는 용어로 사용된다. 거룩은 이전의 것은 죽고, 다시 태어난 것을 의미한다.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온전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부활생명을 가진 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가 적용된다. 여호와께서 주시는 땅은 가나안을 의미하며, 이는 성도의 심령 속에 세워진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부활생명을 가진 자만 이렇게 은혜를 받는 것이다.


 


“이런 일들을 행하는 모든 자, 악을 행하는 모든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하니라”


 


표면적으로는 성전에서 공정치 못한 도량기구로 불의의 재물을 모으는 것을 하나님이 엄수히 여기는 가증스런 행위로 여기신다는 말씀이다. 영적으로는 성도의 심령 속에 부활생명이 없는 자에게는 율법에 따른 심판이 있을 뿐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 나라를 믿는 것도 좋고, 세상의 복도 바라는 기복신앙이야말로 여기에 적용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일서 2장 15-17절『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세상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사이에는 상호 배타적인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빛과 어두움이 공존하지 못하듯이 하나님 사랑과 세상 사랑은 공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영을 살리는 마음이고,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은 영을 죽이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사랑하는 이에게는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다고 사도요한은 말한다. 세상의 특징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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