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난 자의 믿음이 칭의를 얻는다

에베소서 2장 8절 『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예수를 믿게 된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구원받은 줄로 여긴다. 에베소서 2장 8절에서 말하는 믿음은 거듭난 자만 가질 수 있는 믿음이다. 전도해서『예수 믿으세요』라고 말하는 그 믿음이 아니라는 말이다.『예수 믿으세요』라고 하면서 교회로 오게하는 자가 가지는 믿음은 부르심을 입은 자의 믿음이지만, 에베소서 2장 8절의 믿음은 택한 자의 믿음이다. 부르심을 입은 자는 많지만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고 했다. 택함을 입은 자는 예복을 준비한 자로서 구원을 얻는다. 에베소서 2장 8절에서 말하는 이유는 앞에서 설명하고 있다. 2장 1절에서『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모든 사람은 허물(세상죄)과 죄(원죄)로 죽어있다. 영이 죽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게 되었다. 영이 죽어있는 자가 예배를 드린다면 예배 속에 숨어있는 것이다. 예배의 순서가 삶의 순서가 되어야만 하는 이유다. 왜냐하면 영이 죽어있는 자는 세상 일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어려움이 오면 주님을 먼저 찾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안정을 구하게 된다. 누가 주인인가? 주님인가 세상의 안정인가? 세상의 안정을 먼저 찾는다면 출애굽도 하지 않은 상태다. 많은 교회 사람들도 비록 교회에 나오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묶여있다면 주인이 주님이 아니라 세상이 되는 것이다. 허물과 죄로 주님에 대해서 죽어있는 상태다. 그럼에도 에베소서 2장 8절에 힘입어 모두『구원받았다』고 생각한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대하여 죽어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에덴동산의 숲에서 숨어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빠져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죽어있는 것이다. 에베소서 2장 2절에서『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한복음 11장 25-27절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베다니』라는 가난한 동네에서『나사로』라는 사람이 죽었다. 그때 나사로의 누이였던 마르다가 나온 것이다. 마르다에게『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라고 했는데, 24절에서『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했다. 이것은 진리가 아니라 교리에 해당한다. 교리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냥 지식에 불과하다. 요한계시록에서 주님이 사데교회에 말씀하시기를『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지만 죽은 자』라고 하셨다. 성경 지식으로 말을 하고 두뇌 속에서 지식으로 쌓여있을 수 있지만, 죄를 이길 수 없다는 말이다.『너희가 내 말 안에 거하고 참 나의 제자가 되면 진리를 알지니』에서『진리를 안다는 것』은『체험한다』는 말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는 성경 지식이 쌓여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받드는 자라야만 한다. 마르다가 말한 것은 지식으로 다 아는 내용이다. 예수님이『너의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와『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의 차이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다. 24절에서『내가 바로 부활이고 생명인데,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했다. 사람들은 이 말을『죽은 후에 언젠가 다시 살아나겠지』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죽음은 과거형이다. 영어로 보면『though he were dead, yet shall he live』나를 믿는 자는 죽었었지만, 살겠다는 말이다. 주님을 믿는 자가 전에는 영적으로 죽었지만 살아난다는 말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영적으로 죽어있다. 그래서 영적으로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말이다. 문자적으로 번역을 하니까 내용이 이상해진 것...

성소 안에는 생명 만 들어간다

요한복음 20장 31절 『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 앞에 나오는 말씀은 도마에 대한 내용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 부활을 보았다고 하는데, 도마가『당신들이 다 부활을 보았다고 해도, 나는 예수의 손바닥과 옆구리의 못자욱을 만져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도마가 안 믿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삼년 동안 말씀했다.『나는 죽으러 왔는데,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자들도 이 말씀을 기억했다. 그래서 심지어『무덤에서 보초를 세워야 한다』고 까지 말했다. 알기는 아는데, 아무도 예수의 부활을 믿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게 인간의 생각이다. 자기가 직접 육의 눈으로 보기 전에는 믿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철저히 자기가 주인인 것이다. 그래서 이 부활로 인해서 요한복음 20장 31절에서 처럼『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라고 했다. 예수님은『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다. 인간이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성막이다. 주님이 안 계신 곳은 없지만 아무데서나 만날 수는 없는 것이다. 모세를 통하여 하늘의 모형을 보고 만든 것이 성소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방법은 하늘의 모형대로 사는 길 외에는 없다. 성전에 들어가면 마당이 있다. 마당에는 놋 제단에서 짐승을 죽여야만 한다. 죽인 다음에는 반드시 물두멍에서 물로 씻어야 한다. 성전 마당에서는 두 가지가 역사해야만 한다. 제물이 죽어야 하고 죽음을 기초로 해서 씻어야 하는 것이다. 성전 마당이 길이다. 이 세상의 하늘이 보이는 곳이다. 성소에 들어가면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감람유의 등불이 켜져 있다. 그리고 진설병의 떡이 있는데, 이 곳이 진리다. 그리고 지성소에 들어간다. 지성소에서는 법궤가 있는데, 바깥에서는 만나가 시간이 지나면 썩지만, 법궤 안의 맛나는 썩지 않는다. 그 옆...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되나니

로마서 8장 5-9절 『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은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 두 종류다. 교회로 인도받은 사람들은 믿음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온 경우가 많다. 복음을 듣고 와야하는데, 그렇지 못하므로 교회에서 복음을 말해준다.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신앙관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회개가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배웠다면 영의 생각에 대해서 잘 이해할 것이다. 그리고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면 아무리 오래 교회를 다녔더라도 성경 지식은 많이 있지만 육의 생각에 머물게 된다. 육의 생각에 머무는 자는 환란이 오면 불에 타버린다. 그리스도 위에 세우는데, 풀이나 나무나 지푸라기로 살면 불에 타버리고 만다.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세운 것은 불에 더 빛날 것이다. 아무리 인간의 노력으로 세운다고 해도 그것은 풀이나 나무와 같은 것이다.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으로서만 세워질 때 되는 것이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했다. 주님은 가나안 땅을 약속했다. 광야는 약속의 땅이 아니다. 모든 약속은 가나안 땅에서만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지고 적용되며, 열매맺는다. 광야에는 물도 없고 파종할 곳이 없다. 어린양을 의지한다는 사람들도 두 종류다. 평생을 광야에서 살다가 죽느냐, 아니면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태어나느냐이다. 회개에 이르러서, 가정과 일터에서『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할 수 있느니라』라고 믿고 순종하는 사람 만...

자기 몸의 죽은 것 깉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로마서 4장 19-25절 『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아브라함이 백세가 되어 자기 속에는 소망이 없어졌다. 그러나『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사실상 99세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내년에 자식을 주겠다』고 했는데, 창세기에서는 그것을 믿지 못하는듯 속으로 웃었다. 그리고『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해 주십시요』라고 했다. 그런데 로마서에서는 사도바울이 아브라함의 백세 때를 기록한 것이다. 여기에 두 종류의 믿음이 있다. 99세까지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전쟁도 이기고, 제물 위에 주님이 불을 내리어 제물을 태우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지만 그 때까지의 믿음은 아브라함의 육적인 믿음이다. 그런데 100세가 되니까 아브라함 육신 속에는 믿을만한 것이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100세에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인 하늘로부터 오는 믿음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 믿음이 거듭난 믿음이고 회개한 자에게 주어지는 믿음이다. 아브라함은 75세때 하나님이『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다.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난다는 것은 세상에서 나를 도와주고 이해할 만한 사람은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아브람을 도울 자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친척인 롯을 데리고 나온다. 그 다음에는 고향 사람 엘리에셀을 의지한다. 그 다음에는 자...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립보서 3장 10-12절 『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사도바울은 어렸을 때부터 구약성경을 읽고 통달했고 메시야를 기다렸지만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가 메시야인지를 알 수 없었다. 그의 내적 생명은 예수믿는 자들을 잡아죽이고자 하는 생명이 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읽은 성경때문이었다. 그가 발견한 것은 율법이었다. 그는 율법 가운데 메시야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율법을 지키면서 메시야를 기다렸더니 그 메시야를 죽여버린 것이다. 율법이 그렇게 한 것이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게된 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 사람들이 나는 율법에서 벗어나 성령의 법을 따르고 있다고 말은 하나, 회개하지 않은 모든 자들은 갈라디아서 3장 23절처럼 믿음이 오기 전에 율법에 매여있다. 주님은 그것을 불쌍히 여기셔서 다메섹에서 자신을 나타내주셨다.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주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이 처럼 율법에 둘러싸여 있는 자들은 사울과 같이 성경에 통달한 자라도, 예수를 핍박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주님은 고난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신다. 예수님은 예수 때문에 사울에 잡혀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님은 오늘날도 예수 때문에 핍박받는 그들과 함께 있다. 핍박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신앙과 아무런 상관없는 자가 아니라, 자아가 죽지 않은 채 회개하지 않고『스스로 예수믿는다고 고백하고 구원받았다』고 하는 자들일 것이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그 때 사울은 놀랬다. 충격적이었고, 눈이 멀었던 것이다. 이런 사울이 바울로 변화되고 심지어는 고린도후서에서 말한 대로 셋째 하늘을 보고 왔다. 그런데 상세하게 간증하지 않았다. ...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

로마서 6장 6-7절 『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세례에 대한 말씀이다. 6장 2절에서『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라고 표현했다. 인간은 죄를 죽일 수 없다. 죄에 대하여 우리가 죽어야 구원이 이루어진다.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은  2000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길 뿐이다.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전에 구약시대에서는 장차 메시야가 사람들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러 오시는 것이 계시되었다. 구약시대 약속을 믿은 사람들은 미래에 있을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그 믿음과 연합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사는 신약의 사람들은 과거에 십자가에 죽은 예수와 연합된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연합이다. 구원의 길은 쉽지 않다. 좁은 길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에 대해서 설명한다. 그런데 16장에서는『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고백했다. 우리는 그의 죽으심을 본 받아 부활을 매일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죽음을 대신해 죽었다는 것보다 놀라운 것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그와 함께 세례를 통해 죄에 대하여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로마서 6장 3절『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그의 죽으심과 합하는 것이 회개다. 회개는 육적으로 비롯된 자아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적 자아가 바로 죄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회개는 기적이 일어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역사가 넘친다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다. 회개는 십자가가 선포될 때 함께 그 속으로 들어가는 것 뿐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정상적인 일일 것이다. 원래 죽을 수 없는 분이시다. 그 분이 승천하신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 분이 오신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