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마치겠는가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마치겠는가

오늘날 교회는 성령을 받았으니 영원한 구원의 확신이라고들 말한다. 긍정적인 설교가 유행한다.『내가 너와 항상 함께 하리라』는 말을 인용한다. 예수님이 공생애 3년이 지난 후 죽기 전에 마태복음 22장에서 사람들이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에 초청을 받았는데, 왜 예복이 없으면 쫒아내는 일이 있는가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이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예복이 없는 자의 손과 발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운 곳에 던져버려라』 라는 말씀을 했다. 이런 말을 하는 주님이 어떻게 사랑의 주님이란 말인가? 그리고 마지막에『청함을 받은 많데 택함을 받은 사람은 적다』고 말씀하셨다. 도중에 구원을 잃을 사람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겠는가』라는 말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빌립보서에서는『그러므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의 구원을 이루라』 라고 하신다.『내가 너희와 영원히 함께 하리라』라는 말씀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라』라는 말의 단계는 서로 다른 단계이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초신자에게도 『내가 너와 영원히 함께 하리라』라는 말을 한다. 이게 거짓 교리이다. 히브리서 4장에서는 『그들은 너희와 같이 복음을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들이 믿음을 화합지 아니하였으므로 멸망하였느니라』라고 한다. 이 자들은 애굽으로 부터 광야에 나온 자들을 말한다. 광야에 나온 자들은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을 보았고, 그 전 날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칠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당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매일 아침마다 만나를 먹은 자들이다. 낮에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은 자들이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를 받았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구원은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적 생명이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 만이 구원이다. 어떻게 해야 우리의 내적 생명이 바뀌는 것인가? 예수님의 피 공로로 내 죄가 용서받았다고 하는 것이 내적 생명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내적 생명이 바뀌기 위해서는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은 자라는 것을 깨닫고 예수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다시 한번 죽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부활 생명으로 다시 일어나게 된다. 여기에 믿음이 필요하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행위로서가 아니라 듣고 믿는 믿음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단순히 우리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만 구원받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거짓말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믿음과 행함은 나누어지지 않는다. 동전의 양면과 같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행위의 주체를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믿으면 믿는 만큼 행하게 되어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믿음 그 자체는 죽은 것이다.
우리가 회개한 사람이라면 들은 대로 순종한다. 그런데 들은 대로 순종이 안되는 경우가 있다. 왜냐하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회개하지 않은 자는 아무리 들어도 순종하지 않는다. 더 들어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말씀에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라고 했는데,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에 초청을 받을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예복을 준비된 것과는 별개의 것이라는 말이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잘못쓰이는 경우인데, 마태복음에 나오는 열처녀의 비유에서 열처녀가 기름을 준비한다. 예수를 신랑으로 맞이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준비하는 과정에서 다섯처녀는 기름통을 더 준비했다고 한다. 어리섞은 다섯처녀는 등불에 있는 기름 만을 준비했다. 신랑이 더디오므로 그들이 졸고 자는 동안에 기름이 모자라게 된 것이다. 그런데 기름을 더 준비한 자는 문제가 없었다. 기름을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온 것이다. 그리고 신랑이 오자마자 문을 잠궈버렸다. 기름을 사온 처녀들이 문을 열어달라고 하였더니 신랑이『너희는 기름을 준비 안했잖아』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나는 너희를 모른다』 라고 한 것이다.
주님이 우리를 모른다는 것은 구원의 시작도 안했다는 말이다. 우리가 주를 믿으면 믿는 만큼 우리가 주를 알게된다. 그런데 우리가 회개해야지만 주님이 우리를 알게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피값으로 기꺼이 죽음의 값을 마귀에게 지불해서 우리를 사는 것이다. 죄의 삭은 죽음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사탄에게 대신 죽어주셨다.하나님께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느니라라고 하였듯이 죄를 용서받는 길은 피흘림 만이 필요하다. 그런데 사탄으로 부터 우리를 건져내기 위해서는 우리 대신 죽어주셔야만 한다. 사탄은 가혹하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사탄은 그것을 원하는 것이다. 사탄이『하나님의 아들 예수 네가 저들을 건져내기 위해서는 네가 대신 죽어야 해』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니까, 이들은 죄를 지었으니 대신 예수가 죽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죽어야 하는 죄인이라는 것을 회개하는 자를 위해서 죽으신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에게만 적용이 된다. 구원의 시작은 나의 전부를 주님께 드릴 때 주님의 전부가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이것 만이 구원인 것이다.
한 50%는 예수를 믿고, 50%는 나를 믿고 신앙생활하다가, 점점 자라서 이제 70%는 주님께 드리고 나머지 30%는 여전히 나를 믿다가, 점점 신앙이 자라서 90%를 주님께 드리고 10%는 나를 믿는 믿음은 구원의 시작도 하지 못한 것이다. 구원의 시작은 나의 전부가 주님께 속한 것이다. 나의 전부가 주님께 속하지 아니하면 구원의 시작도 하지 못한 것이다. 나의 전부가 주님께 드려질 때, 주님의 모든 생명이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이게 바로 세례인 것이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왜 육체로 마치는가 하면 갈라디아서 4장에서는 이삭과 이스마엘에 대해서 설명하는데,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났고, 이삭은 약속을 따라 태어났다고 설명한다. 즉 이삭은 성령을 따라 난 자라는 말이다. 이삭이 거듭난 자이다. 갈라디아서 1장에서는 다른 예수가 있다고 설명한다. 이스마엘이 다른 복음이라는 말이다. 3장에서는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준다고 하였는데, 아브라함이 믿었지만, 그런데 믿다가 안믿게 되었는데, 하갈을 취해서 이스마엘을 낳은 것이다. 이게 바로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친 자라는 말이다. 아브라함이 처음에는 믿었는데, 왜 안믿게 되었는가? 나도 예수를 믿게 되었고, 최선을 다해서 따라보는데, 이런 믿음은 구원의 시작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자기 믿음이다.
나의 믿음으로는 구원받지 못한다. 사람들은 모두 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다 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믿음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기적을 체험하고 주님을 만난 간증이 있다고 해서 구원이 시작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경우가 이에 해당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3년 동안 놀라운 기적들을 보고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대화하는 영적인 체험을 다 해보고 풍랑 위를 걸어본 초자연적인 경험도 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님으로 부터 들어왔다. 그런데 예수님이 잡혀 죽기 전날 밤에『너희는 다 나를 버리리라』라고 했다. 이 말은 너희의 생명이 나를 따를 수 있는 생명이 아니라는 말이다. 제자들이 기적을 체험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있지만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을 때 예수와 연합될 수 있는 그런 믿음은 아니라는 말이다. 베드로는 말하기를『이 사람들은 주님을 버려도 나는 버리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예수님이『새벽 닭이 울 때까지 나를 세번 부인하리라』라고 하셨다 그런데 베드로는 부인했다. 자기가 거짓말하는 생명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경이라는 말이다. 기적을 체험하는 믿음이 거짓말하는 자신의 마음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환경을 통해서 믿는 믿음은 환경이 변화될 수는 있지만 내적인 변화는 아니라는 말이다. 구원은 환경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뀌는 것이다. 애굽을 나와 홍해가 갈라지는 경험을 해도 그게 구원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광야에서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광야에서는 바로 왕의 핑계를 댈 수 없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자인지 드러나는 것이다. 매일 새벽 마다 맛나를 먹었고, 매일 매일이 기적의 삶이었지만 매일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는 그런 자였던 것이다. 하나님을 매일 원망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길이 험하고 물이 없었으므로, 홍해가 갈라졌을 때는 모세 앞에서 환호의 춤을 추었지만, 마실 물이 없었을 때 모세에게 돌을 던지는 그런 자였다. 육체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하나님이 회개의 길을 주신다.
지금 우리의 믿음은 어떤 것인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주님이 기도 응답하시고, 환경을 도와주셔서 살게되었지만 우리가 변하지 않았다면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마치겠는가 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준다고 했는데, 그 말을 처음에는 믿었지만 행위의 결과는 이스마엘을 낳았던 것이다. 베드로에게는 3년이 지난 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의 믿음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었는데, 예수님이 체포되어서 죽게되니까 믿음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믿음의 대상이 육신의 눈에서 사라지므로 믿음이 사라진 것이다. 아브라함은 13년쯤 지나니까 자기 육체 속에 이스마엘을 날 만한 그런 육체의 조건도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녀를 준다하니까 『내가 100세가 되었거늘 어찌 자녀를 낳으리요 이스마엘이나 당신 앞에서 살게하소서』라고 믿음이 사라진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믿음이 있는데, 믿음이 연약하다고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구원이 시작과 괸계되는 것이지 믿음의 분량과는 관계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초신자에게는 믿음의 분량이 더 늘 수 있도록 사랑의 하나님을 설교하라지만 사실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가 더 중요한 것이지 초신자인지 믿음이 강한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아브라함은 100세가 되어서 하나님을 완전히 안믿게 되었다. 이 것이 육체로 마치는 것이다. 우리 인간에게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불가능하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역사하셔서 부활 생명으로 임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회개 뿐인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회개는 성령이 도와주어야 가능하다고 말이다. 그리고 열심히 믿음을 다지도록 노력하고 있다고요 하고 말한다. 모든 것이 마귀에게 속은 것이다. 믿음이 아니라 믿음의 행위가 중요하다. 바로 내가 예수와 더불어 십자가에서 죽는 믿음이 있어야 하며, 그렇게 되었음을 선언하는 믿음이다. 이것이 거듭나는 것이다. 죽는 것은 내 자아 곧 옛사람이 죽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회개다. 회개는 옛사람이 죽는 것을 말한다. 믿음 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옛사람이 죽는 회개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성령이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는 것이다. 내가 죽지 않은 믿음은 내가 인정받지 못할 때 분노하고 괴로워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할 때 못견디는 그런 모습이다. 자기 뜻대로 살고 싶은 믿음이다. 구원받지 못한 자의 믿음이다. 가짜 믿음인 것이다. 예수와 함께 죽지 않는다면 구원의 시작이 아닌 것이다. 예수님은 구원의 검을 주러오셨다. 제대로 예수를 증거한다면 분쟁이 일어날 것이다. 왜냐하면 마귀와 싸움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제대로 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복음은 바로 예수와 연합하여 죽는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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