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 중에는 두가지 유형의 신앙인이 있음을 발견한다.『하나님이 이 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말하는 자와『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셨으니』 라고 말하는 자들이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죄를 대속하셨으니 하나님의 사랑이 보이는 것이고,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죄를 용서하시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아들에게 진노를 쏟아부으시는 의를 나타내시는 것이다. 어느 쪽을 바라보아야 하는가? 둘 다 맞다. 그러나 순서가 있는 것이다. 의가 먼저이고 그 다음이 사랑인 것이다. 사랑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의를 놓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사랑만을  말하는 사람은 구원의 기회를 잡을 수 없는 것이다. 구원의 기준은 십자가에서 비춰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을 진노하신다. 거듭나기 전에는 본질상 모든 사람이 진노의 자녀인 것이다. 하는 모든 인간의 행실이 죽은 행실이다. 진정 주를 위하여 살아가는 자가 얼마나 될 것인가? 하나님의 의를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볼 것인가? 우리의 초점은 하나님의 의에 맞추지 않으면 곤란하다.
하나님의 의에 초점을 맞출 때 비로소 회개가 무엇인지 깨닫기 때문이다. 회개가 제대로 이루어질 때 칭의가 있고, 성화가 이루어진다.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회개가 안된 것이고, 삶의 열매가 없는 것은 회개가 안되었기 때문이다. 마귀가 회개를 막기 위해서 총력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회개는 내가 죽을 죄인임을 깨닫고 다시는 나를 위해 살지 않는 것이 회개다. 그러나 현실을 어떠한가? 나를 위해 예수를 믿는 것은 마귀의 미혹이다. 천국 가기 위해서 예수믿는 자들은 다 회개하지 않은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나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를 만나기 위하여는 회개하는 자 만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회개한 자만이 이 땅에서 성공과 행복을 다 잃어버려도 예수 만을 찾는 자가 될 것이다. 예수가 삶의 방법이 되어서는 안되고 오직 예수가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좁고 들어가기 어려운 길이다.
노아는 의를 전파했다. 왜 주님이 노아에게 의를 전파하게 했는가? 의를 모르면 회개할 수 없기 때문이다. 120년 동안 노아가 부르짖었지만 단 한명도 주님께 돌아오지 않았다. 베드로후서 2장 5절에『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의 문화를 바라볼 때 마음이 상하지 않는다면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고 있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마음이 상하는 사람들이 과연 있는가? 세상과 똑같이 살고 있는가? 교회도 세상과 똑 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면 거짓 교회일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는 거룩하게 구별되어서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똑 같아서 부담없이 오게하는 교회로 만들고 있는 실정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기준은 변한 적이 없다. 노아때 제시된 그 기준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에게 제시되었다. 구원은 바뀐 적이 없는 것이다.
노아의 시대나 소돔과 고모라의 때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심판한다고 하는 의의 도를 전파했지만 모두 농담으로 여겼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다고 말한다면 농담으로 여길지도 모르겠다. 오늘날 교회에서 사람들이 자기의 죄를 버리고, 죄를 일으키는 악을 제하여 회개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그냥 죄를 고백만 하고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싶다. 세상이 얼마나 가증한 것인가를 혐오하기 보다는 세상을 즐기며 보다 나은 행복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 아닌가? 세상에서 잘못될까봐 두려워서 떨며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다. 이렇게 한다면 회개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노아가 의를 외쳤다. 노아는 당대 의인이었다. 완전한 자였다. 의가 없이는 완전하지 못하다.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씀이다. 의가 없이는 사랑도 소용이 없다. 노아가 전한 방주의 하나님과 십자가의 하나님은 동일하신 분이다. 신 구약의 하나님은 동일하신 분이다. 구약의 하나님이 물로는 다시는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을 말씀하신다. 불로 심판하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인간은 악한 존재이다.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에덴동산에서 거의 완전한 행복을 가지고 있던 인간이 사단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선악과를 하나 더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린 것이다. 에덴동산 전체를 가지라고 주셨는데,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 하나 마저 먹으려고 탐심을 가진 존재라는 말이다. 이게 우리의 모습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이것을 깨닫는 자들은 회개 외에는 구할 길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노아가 외쳤다. 『120년 뒤에 하나님이 심판하신다』그러나 사람들은 아름다운 세상을 바라보면서 끝없이 살 것으로 느끼고 사랑의 하나님을 생각했을 것이다. 다윗이 이를 두고 시편에서『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자는 멸망하는 짐승과 같도다』라고 말했다. 인간은 불의 가운데 진리를 붙잡는다. 내가 불의하면서도 진리를 붙잡는다. 자기가 하나님인 것이다. 하나님이 진노하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전해야 한다. 이것 만이 복음이요, 살길이다.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오늘날 노아의 외침을 비춰볼 때『노아, 너만 하나님 믿느냐? 우리도 예배해, 이 아름다운 세상과 행복한 가정을 감사하면서 살고있어』라고 말할 것이다. 방주의 문이 닫힐 때 까지 그 방주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것을 아무도 분별하지 못했다. 이것이 불의의 증거인 것이다. 방주는 안팎으로 역청을 발랐기 때문에 시컴했다. 낮에도 방주 안에 들어가면 캄캄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방주를 보고 그 곳이 죽음이다』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인간들을 구하기 위한 방주를 인간들은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온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것이 믿어지는 사람만 방주가 하나님의 사랑이 되듯이 하나님 심판의 말씀이 사랑으로 전달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전파하는 것 만이 사랑인 것이다. 사랑과 의가 분리된 적은 없다. 의가 사랑인 것이다. 의가 비춰져서 우리에게 빛이 도달하면 그것이 사랑인 것이다. 노아가 전한 의는 주님이 온 땅을 진노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을 십자가 위에서 자기 아들에게 보이셨다. 하나님이 의로운 아들에게 진노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나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고 예수의 십자가와 연합되는 자 만이 회개하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나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지만 감사하는 것으로 끝내는 경우를 보게된다. 내가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은 싫다는 몸부림이다. 이것은 그냥 예수믿는 의식에 불과한 것이다. 내가 죽어야 할 것을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죽었는데, 그것을 믿으면 되었지 왜 같이 죽어야 하는가? 라는 식이다. 그냥 십자가에서 흘린 피를 회개없이 믿으면 된다는 식이다.『같이 죽는 것이 바로 회개』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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