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앚히시니
에베소서 2장 5-8절『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이것이 세례다. 세례는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과 함께 살리신다. 이게 개인적인 구원이다. 이것이 요단강의 세례고 거듭남이다. 거듭남과 세례는 함께한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의 세례가 요한복음에서 거듭남으로 표현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6절에서 말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6절『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우리의 육은 출생한 그대로인데,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면 새 생명으로 바뀌어진다는 말이다. 새 생명이 될 때 모든 죄의 사함을 얻게된다. 죄사함을 얻어서 새 생명이 되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잘못된 것이다.
사도행전 2장 38절에서『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죄사함을 위하여 세례를 받으라는 말이다. 세례의 결과가 죄사함이다. 육적인 것이 죽어야 죄사함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 회개, 세례(예수와 함께 죽고), 죄사함을 받은 후, 성령을 선물로 받는 순서다. 그런데 오늘날 회개한 적도 없는데, 성령부터 받으려고, 또는 주려고 하는 자들이 있다. 이런 절차가 없는데,『하늘에 앉히시니』를 강조한다고 해서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오늘날 교회에서는 처음 나온 사람에게 하나님이 이렇게 택하셔서 교회에 나오게 하셨고 영원한 천국으로 하나님이 이끌어 가신다고 한다. 부르심을 받는 것과 택한 것을 구분하지도 않고 말들을 하니까, 회개한 적도 없는 사람도『그렇게 되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믿는 자의 육체는 여기에 있는데, 거듭난 자에게는 예수님을 부활하게 하신 하나님이 거듭난 자 안에 새 생명을 주신다는 말이다. 이것이 새 창조다. 새롭게 지으심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러면 함께 하늘에 앉히신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하나님이 다시 살리셔서 40일 후에 승천하시고 하늘에 앉히셨다. 누가복음 24장 51절에서『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승천까지 기록했다. 예수님은 베다니 앞에서 승천하셨다.
에베소서 1장 20-22절에서도『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부활했을 때는 사망권세를 이기셨지만, 승천하신 후에는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다. 교회가 만물 위에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만물 위 교회의 머리라는 말이다. 왜 오늘날은 만물 위의 교회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은가? 그것은 승천하신 주님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23절에서『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오늘날은 교회가 오순절날 성령이 임하셔서 탄생했다고 가르친다. 완전한 말이 아니다. 오순절날 임하신 성령은 그들 위에 임하시는데, 성령이 임하시면 능력을 받아, 땅끝까지 증인이 된다. 그러나 교회는 성령이 임하기 전에 이미 세워졌다.
요한복음 20장 21-23절은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의 일이다. 예수님이 문을 닫았는데, 그냥 들어오셨다. 그리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셨다.『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부활하신 다음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숨을 내쉬며』는 그들 안으로 숨을 보낸 것이다. 성령을 받으라고 했다. 예수님이 숨을 내쉰 성령은 아담을 흙으로 만든 다음에 그 속에 생기를 불어넣은 것 처럼 부활하셔서 그들 안에 불어넣으신 것이다. 사람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시다. 이게 구원이고, 구원받은 자에게 오순절날 능력의 성령이 그들 위에 임하신 것이다. 오순절날 임하신 성령은 구원을 위한 성령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들 위에 능력으로 임하신 성령으로 증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방언을 하게되었다. 증인이 된다는 말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임하시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이 증거되기 위하여 임하시는 것이다.
개인적인 구원의 성령은 사람 안에,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증거되기 위해서는 사람 위에 임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 1장 8절의 오순절에 임한 성령은 우리가 성령 안에 있는 것이다. 부활하셔서 말씀하신 것은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게 하신 것이다. 요한복음은 사람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말했고, 내적 생명을 말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사이에 요한복음은 부활에 대한 사건 전체의 1/3을 기록한 것이다. 이 성령은 죄를 사하는 권세를 말한다. 누구의 죄든지 용서하면 사하여지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다는 말이다. 이게 내적 성령의 역사다. 스테판이 죽을 때 예수님과 동일하게 기도한다.『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못합니다.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이게 내적 성령의 역사다. 성령이 스테판 안에 거하신 것이다.
오순절날 교회가 탄생했다고 믿는다면 문제가 상당히 있다. 에베소에 교회가 탄생한 것은 예수님이 승천하셨을 때다. 주님이 승천하셨을 때,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케 하셨기 때문이다. 오순절날 성령을 주셨을 때 만물을 복종케하신 것이 아니다. 이미 승천하셨을 때 만물을 복종케 하신 것을 잘 깨달아야만 한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성령이 그들 안에 거하게 하신 것이다. 성령이 거하는 곳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승천의 의미를 모르면 교회의 의미도 잘 모르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성령이 임하는 자를 성도라고 한다. 성도들이 모이는 하나됨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성전이 된다. 교회 건물이 성전이 아니라 성도들의 연합과 하나됨 속에 성전이 있다. 하나됨 속에 하나님의 권세가 있는 것이다.
헬렐(히브리어, 헬라어: 루시퍼)이 하나님을 대항하여 쫒겨났다. 그래서 사단이 되었다. 자기 지위에서 쫒겨났다.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는 것이 교만이다. 겸손한 자는 자기 자리를 지킨다. 자기 직분을 지키는 것이다. 사단은 능력을 잃어버리지 않고, 권세를 잃었다. 사단은 다니엘이 기도하기 전에는 미카일도 이 땅에 와서 역사할 수 없도록 막을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다. 우리가 사단을 능력으로 이기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사단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바로 권세다. 경찰은 개인적 능력이 아니라 권세를 가지고 있다. 경찰 개인은 강도와 싸울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권세가 있으므로 총을 소지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사단은 사람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능력이 월등하다. 사단이 교회를 두려워하는 것은 교회의 권세 때문이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성령이 임하시고 충만해져서 성령의 능력이 나타난다. 오순절 성령을 받기 이전에 마태복음에서『하늘과 땅에 있는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너희는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했다. 교회는 권세가 있다. 마태복음 18장 15-17절에서 교회의 권세에 대해서 말한다.『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님께『죄를 몇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490번 뿐만 아니라 계속 용서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교회적으로는 영원히 용서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주님은 니골라당을 미워하셨다. 개인적인 용서를 교회에 적용할 수 없는 이유다. 사랑이 신이 되어버린 오늘날 교회, 개인적인 사랑을 사단은 교회에 적용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교회가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사랑만을 강조하고 있다면 사단의 전략에 넘어져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교회는 하나되는 거룩하고 권세있는 교회다. 부르심을 받고 교회에 첫 발을 내딛는 사람에게 택함을 입은 자에게 하는 말과 같이『당신은 이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당신을 버리시지 않으십니다』라고 말하지 말고,『회개하고 거듭나야 한다』는 말로 참된 성도가 되도록 해야만 한다. 그래야 교회가 참된 성도를 통해 하나가 되는 권세를 지킬 수 있다. 거듭난 자는 태생적으로 하나가 된다. 그래서『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신 것이다. 힘써 노력하여 하나되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된 것을 지키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되어야 하는 교회의 속성을 이용하여 목사가 신도를 개인적인 목적을 위하여 순종하도록 요구한다면 안된다. 오늘날『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로 유혹하는 가짜 교회와 그 속의 가짜 성도, 그리고 순종을 강요하는 싹꾼 목사로 인해 교회의 권세가 잃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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