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사도행전 1장 3절『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하나님 나라의 일이 무엇인가?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들어갈 수 없다. 하나님 나라를 감추어 놓았다. 거듭나지 않으면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다. 주인이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육으로 비롯된 혼적인 존재에서 영적인 존재로 바뀌는 것이다. 육의 혼은 구원받지 못하지만 영이 구원받는다.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을 때 마태복음 27장 50절에서『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영혼이라고 번역된 것은 잘못이다. 영은 spirit, 혼은 soul로 번역되며, 서로 다른 존재다. 번역을 담당한 자가 인간의 육과 영혼이라는 2분설을 믿었던 모양이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허물과 죄로 영이 죽어있으므로 당연한 결과이다. 예수님이 크게 소리지르며 영이 떠났다.
스데반이 죽었을 때 사도행전 7장 59절에서『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여기도 영혼으로 잘못 번역 되었다. 영혼이 아니라 영이다. 그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을 때 사도행전 5장 5절에서『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아나니아는 영이 죽은 혼적인 존재임이 드러난다.
아나니아가 왜 죽었는가? 5장 3절에서『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사단이 충만한 자는 교회에서도 참 성도와 비슷하게 행동하지만 가짜다. 많은 교회 사람들이 성도와 엇비슷하게 믿고 행동하면서『믿음이 좋은 것』으로 생각한다. 사단이 충만한 줄도 모르고 그렇게 믿고 있는 셈이다. 그 안의 주인은 사단이다. 영이 죽은 혼이라는 말이다.
5장 4절에서『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내 뜻대로 사는 사람은 사단의 충만함을 입은 자다. 이 말은 교회 내의 많은 사람에게도 해당될 수 있다. 내 마음 대로도 못하고 주님의 말씀도 완전히 따르지 못하는 상태,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므로 비슷하게 믿고 행동한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경우다. 이런 사람은 예배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지 않는다. 다만 정신적으로 가끔 자신의 감동에 휩싸이는 것이다. 이게 성령을 속이는 것이다.
자신이라고 하는『나』는 혼적, 율법적 존재다. 그 혼적인『나』라는 존재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구원받는다. 죽어야지 예수님을 살리신 그 생명을 죽는 자에게 역사해서, 하나님이 다시 친히 살리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 들어가서 영이 살아나는 것이다. 살아난 영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게 거듭남이다. 거듭남이라는 말은 』다시 태어난다『는 말이다. 다시 태어나려면 옛 것(옛사람)이 죽어야만 된다. 영이 살아나면 하나님 나라의 일을 알게된다.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서 구원의 비밀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믿지만 내 것을 주장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 곳은 혈과 육을 바탕으로 하는 갈등이 존재할 것이다. 회개하는 자는 내가 상대를 판단하는 율법적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적 존재인 내가 죽는 것이다. 내가 깍이고 부숴지는 삶이 바로 회개하는 삶이고 거듭남이다. 회개하는 자는 상대방을 고치려고 하지 않는다. 회개의 길은 빛과 어둠처럼 분명하다.
야곱과 에서의 길이 다르다. 하나님은 에서를 고치려고 하지 않고 그냥 둔다. 에서를 통해서 야곱을 부수시고 고치신다. 회개하는 자는 상대방을 고치려고 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이 낮아지는 자리에 머문다. 낮아지는 자리에 머물지 않는 자는 회개하지 않은 자다. 낮아지지 않는 자는 혈과 육으로 사는 자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내 뜻을 주장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기 때문에 낮아지는 자리에 가지 않는다. 이게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다. 그 사람의 삶 주체는 바로 혼이라는 말이다. 혼적 존재에게는 사단이 충만하다. 죽으면 혼이 떠난다. 구원받지 못한다. 혼적인 존재는 하나님 나라를 알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오직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영이 들어가는 곳이다.
요한복음 12장 39-40절『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37절에서『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회개하지 않는 혼적인 존재는 믿음을 가질 수 없다.『기적을 경험했다고 믿는 것』은 그 기적의 사실을 통해서 객관적인 대상을 믿는 것이지, 그 기적을 통해서 육체 속의 존재인 혼이 영으로 바뀌는 것이 아닌 것이다. 바뀌려면 혼이 죽어야만 한다. 성령의 체험을 하면 믿게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그 믿음은 거듬남의 믿음이 아니다. 자신이 그냥 믿는 것이지 하늘로 부터 오는 믿음이 아닌 것이다.
마가복음 4장 12절에서도 혼적인 존재를 두고 말씀하셨다.『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돌이켜』는 거듭남의 다른 표현이다. 혼적인 존재는 자신이 아무리『믿습니다』 외쳐도 거듭나지 않는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자신이 영적인 존재인가 혼적인 존재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누가 주인인가』가 답이다.
혼적인 존재도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을 수 있다.『내가 죄를 고백했기 때문에 모든 죄가 예수의 피로 씻어졌음을 믿습니다』라고 해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어린양을 죽이기 전에는 그 피를 적용할 수 없다. 혼적인 존재는 어린양이 살아있는데도 그 피를 적용하려는 것이다. 어린양이 죽는 것은 누가 죽는 것인가? 예수가 어린양이다. 그리고『나』라는 혼적인 존재도 어린양과 함께 죽어야만 한다. 그런데 나는 죽지 않고 예수님의 피만 적용하려고 하는 것이다. 혼적인『나』도 예수와 함께 죽을 때 어린양의 피가 적용되는 것이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거짓 구원에 유린당하고 있는가? 사단의 전략에 속고 있는 것이다.
그 날에 예수의 피만 믿다가, 예수님이『나는 너를 모른다』라고 했을 때, 정말 황당하고 아찔할 것이다. 예수의 피만 믿는 사람은 죄를 이길 수 없다. 왜냐하면 내적으로 죽지 않았기 때문에 혼적인 존재의 주인은 사단인데, 죄를 이길 수 없는 것이다.『예수의 피 밖에 없네』 라고 찬송을 해도 죄를 이길 수 없다. 그런데 죄는 깨달아진다. 그래서 매일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받으려고 한다. 이렇게 하면 의인이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현실이다.

평생 죄를 고백만 하는 혼적인 존재인 것이다. 또 죄짓고, 고백하고 용서를 받으려고 하고, 또 죄짓고, 하나님을 믿지만『죄를 짓는 것은 육신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요한복음 8장에서『다시는 죄를 짓지말라』고 하는데도, 육체적 한계 때문에 당연한 것으로 받아지는 이유는 혼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냥 죄를 씻기만 하려한다. 베드로전서 3장 21절『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혼이 죽어야만 영이 살 수 있다. 혼이 죽는 것은 요한1서 2장 15-17절에서 말하는 바, 혼이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혼은 세상 사랑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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