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요한복음 16장 30-32절『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제자들이『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믿는다』고 하니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너희가 믿느냐』라고 표현했는데『너희가 드디어 믿게 되었구나』라는 표현이 아니다.『지금 너희들이 나를 믿는다고?』라는 반문하는 말씀이다. 두 표현의 차이는 엄청난 차이를 가지고 있다.『너희가 드디어 믿게 되었구나』라는 표현은 인간 중심의『믿는다』라고 사람들이 해석을 하고 있다. 제대로 된 번역이 아니라 인간 중심으로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해석이 가짜 구원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주님은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지파의 대표 12명이 다녀왔는데, 여호수아와 갈렙 만이『약속한 땅이 맞다』라고 말한 것이다. 열명은『거민을 삼키는 땅이다 들어가면 다 죽는다』라고 했다. 자기 판단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그들이 눈으로 본 것은 네피림이었다. 그래서 두려움이 들어왔기 때문에 자기 생각의 말(거짓말)을 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약속한 가나안 땅도 판단하지 못하는데, 오늘날 자신의 판단으로『구원이 어떠함』을 판단할 수 있겠는가? 모든 사람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다. 하나님을 찾는 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게 성경에서 말하는 주님의 선언이시다. 가끔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므로 하나님을 찾는 것으로 생각한다. 자기가 주인인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왕이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를 준비했다. 왕이 초대장을 보냈지만『다 일치하여 사양하거늘』라고 표현했다. 인류 역사에 왕이 초대했는데, 모든 사람이 일치하여 사양한 경우는 없을 것이다. 오직 주님의 나라에만 해당된다. 그래서 탕자의 비유를 여기에 적용하면 곤란한다. 탕자의 비유는『아버지는 부르지도 않았는데, 그 탕자가 스스로 깨닫고 돌아왔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교회 처음 나온 사람에게 탕자의 비유를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말씀이다. 이 세상에 스스로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자는 없기 때문이다. 선지자를 보내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보냈는데, 아들마저도 죽였다. 아들을 죽이면 이 땅을 상속할 줄로 여겼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따를 수도 없고 따르기를 원하지도 않는 존재다. 본질성 진노의 자녀다. 하나님이 진노하신다. 이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바울의 복음이다.
주께서 모든 사람을 심판할 자를 세우신 것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심판하신다. 그런데 심판할 그 사람을 세우신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 예수인가 나인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 우리가 바라보는 예수는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가 아니라 십자가에 죽은 시체인 예수와 연합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 시체가『자기』라는 것을 깨닫기 전에는 예수님이 왜 죽었는지 모르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이 순간은 피하고 싶어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냥 대속하신 것으로 하고 피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죽은 예수의 시체가『나』라는 것은 인식하지 못하면 구원은 없는 것이다. 죽은 예수 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삶 자체가 죽으신 십자가의 예수 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십자가에 죽은 시체인 예수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 부활하신 예수 속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베드로가 삼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기적을 보고 하나님 말씀을 배웠다. 베드로가 보니까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깨달았다. 삼년이 지났다. 베드로는『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과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셨다.『네가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오늘밤 너는 나를 세번 부인하리라』라고 했다. 그리고 설교하신 것이다. 이 설교를 들은 제자들은 베드로처럼 주님을 따르지 않았다.
모든 제자들은『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예수님을 진짜 믿었다. 그런데 예수님이『너희가 나를 믿는다고?』하셨다. 그리고『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라고 하셨다.『제 곳으로 흩어지고』라는 말은 이사야서 53장 6절에서『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는 말씀을 떠올린다.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 곳으로 흩어진 것이다.
제자들은 가정과 직장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러나 이것이 회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회개는 내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즉 회개는『육적 자아』를 버리는 것이다. 베드로가 말한『주를 위해 죽을 지언정 주를 버리지 않겠다』고 말한 것은 육적 자아다. 육적 자아를 버리지 않는다면 계시록에서 말하는 미지근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자들은 모두가 육적 자아를 사랑하는 자들이다. 육적 자아가 죽어야 함을 말하지 않고, 선을 행하거나 노력하여 육적 자아를 깨끗게 만들려고 하는 그런 구원은 정말 가짜다. 회개는 자아가 죽는 선언이요, 삶 그 자체가 되어야만 한다. 그래서『열심을 내어 회개하라』고 한다. 즉 죽을 때까지 인간 내적으로 자아의 죽음의 상태를 유지해 나가야만 한다. 회개한 자는 하나님께서 죽은 영을 살릴 것이다. 이 죽었다 살아난 영의 마음이 육적 자아와의 처절한 싸움을 할 것이다. 육체의 목숨이 끝날 때까지 마귀는 괴롭힐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영의 마음이 육의 마음(혼)을 이겨야만 하는 이유다.  
육적 마음으로 예수를 믿는 것은 구원받을 수 없다. 회개하여 육의 마음이 죽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 구원은 육의 마음이 아니라 영의 마음이다. 영이 구원받는다.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왕이 혼인잔치에 초대한 자 중『예복을 입지 않은 자를 결박하여 어두운 곳을 던져라』고 했다. 예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예복은 살리신 영의 마음이다. 육신의 마음을 뚫고 살리신 영의 마음을 입어야만 하는 것이다. 주님이『부르심을 받은 자는 많지만 택하심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말씀하셨다. 예복을 입은 자는『얼마 없다』는 말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말을 생각해야만 한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재물이 없건, 건강에 문제가 있건 염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이다.

구원은 육체의 두뇌와 머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나타나야만 한다. 마태복음 5장 14절에서『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회개하고 영의 마음이 살아난 자들은『세상의 빛처럼 나타내는 삶이 되어야만 된다』고 하셨다. 빛과 같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육적으로 자기가 믿는 믿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믿기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육적 자아가 죽었는지 생각해 보면 알 것이다.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회개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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