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데살로니가후서 2장 10-12절『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주님이『모든 사람을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성경에『안식과 기업』이라는 말은 있지만『기업과 안식』이라는 말은 없다.『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있지만『꿀과 젖이 흐르는 땅』은 없다. 주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실 때에 안식과 기업을 주시겠다고 하셨다. 가나안 땅이 있는 자에게는 안식으로 보인다. 내가 주인인 사람에게는 기업으로 보인다. 내가 얻어야 할 땅이 되는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이 6일 동안 하신 일에서 일곱째 날에 하나님과 안식했다. 구원의 시작은 먼저 안식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에게 주님은 안식을 주신다. 그 안식 가운데 기업을 얻게 하신다. 그 기업도 주님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안식하는 자는 하나님이 기업을 얻게 하시는 것을 보게된다. 그 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젖은 성경에 젖뗀 아이의 평안이라는 말이 나온다. 젖은 아기로 인하여 엄마를 안식하게 하는 양식이다. 그러나 꿀은 전쟁을 이겨서 기업을 얻게 하시는 말씀이다. 요나단과 전쟁할 때 사울왕은 어리섞게 꿀을 먹으면 이기는데, 전쟁에 이길 때까지 꿀을 먹지 못하게 했다. 요나단은 전쟁을 하다가 피곤해서 꿀을 집어 먹었더니 눈이 밝아졌다고 한다. 전쟁을 이기는 양식은 꿀 같은 말씀이다.
성경에는 순서에도 영감이 있다.『진리의 사랑』이라는 말은 있어도 『사랑의 진리』라는 말은 없다. 그러나 세상이 추구하는 것은『사랑의 진리』다. 영화나 소설을 보면『사랑이 무엇인가』를 논한다. 사랑의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성경은『진리의 사랑』을 말한다.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는 자에게는 11절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주님에게 달려있다. 그래서 아무리 설명을 해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진리를 믿지 않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이 거짓의 것을 믿게 두시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은 나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을 사랑해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셔』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주님은 아무에게나 함께 하시지 않으신다. 끝까지 지키신다고 아무에게나 하시지 않으신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하셨다. 이것은 그를 비방하는 자나 위로하는 자에게 십자가로 초대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부활은 아무에게나 보여주지 않으셨다. 부활은 처음부터 끝까지 따른 제자들에게만 보여주셨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천국 비유와 일치한다.
천국은 아들의 혼인잔치를 준비한 임금과 같다. 이것이 아버지의 기쁨이다. 그래서 왕이 혼인잔치에 초대했는데,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이게 인간의 모습이다. 예수님의 비유는 이 땅에 맞지 않다. 자신의 죽음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22장에서 왕이 노해서 군대를 보내 초대에 응하지 않은 사람의 동네를 불살라 버렸다고 했다. 혼인잔치를 준비하다가 심판을 하는 것이다. 인간들은 그 초대에 아무도 응하지 않은 자들인데, 이제 악한 자나 선한 자나 아무나 데려오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격이 없지만 혼인잔치에 들어왔는데, 주님이 한가지를 본다는 것이다. 한 사람에게 말하기를『왜 너는 예복을 입지 않고 왔느냐?』그가 아무 말도 못했다. 천국에 가려면 천국에 합당한 것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그게 구원이다. 결혼식에 가려면 결혼식에 합당한 복장을 해야만 한다. 아니면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왕이『저자를 손과 발을 묶어 바깥 어두움에 던져라』고 말했다. 마지막 말씀이『부르심을 입은 자는 많되 택하심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였다.
교회 처음 나와서 교리 설명을 잘하고, 교회에서 사랑을 많이 베풀고 해서 그가『하나님을 믿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게 구원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믿음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지만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에 처음 나온 자들에게 사랑의 하나님을 말해야 하는가? 진노의 하나님을 말해야 하는가? 말하는 자들도 그 말에 대해서 잘못된 선택을 한다면 곤란하다.
오늘날 모든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자들이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어 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못박는 자들이다. 그들에게는 진리가 없다.『진리의 사랑』을 받아야만 구원받는다. 구원은 청함 받아서 혼인잔치에 들어왔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미지근한 자는『토하여 내친다』고 했다. 예복을 입어야만 한다. 택함을 입은 자만 구원받는다. 디도서 1장 1-3절『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한 것인데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이 전도로『택하신 자의 믿음』에 이르게 되어야만 한다.
택하신 자의 믿음이 무엇인가? 먼저 택하신 자의 믿음이 아닌 것을 설명하면 요한복음 8장 30절에서『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그런데 택하신 자의 믿음은 31-32절에서 설명하신다.『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결국 8장 45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다.『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유대인들은 처음에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예수님을 믿었는데, 예수님은『나를 믿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무슨 차이인가?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믿는 믿음은 예수님이 인정하시지 않는 믿음이라는 말이다. 오늘날『다 예수믿으면 구원받는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중요한 것은『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이다.『듣고 그 말을 믿는 것』과『거한다』는 말은 다르다.『듣고 그 말을 믿는 것』은 택하신 자의 믿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으므로 왔는데, 예수님은『나를 믿지 않는다』고 말한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죄인 속에는 믿음이 생길 수 없다. 죄인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예수를 믿는데?』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자기가 쌓은 믿음에 불과하다. 요한복음 8장 46-47절에서『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하나님께로 속한 자가 바로 하나님께로 부터 난 자(거듭난 자)다. 거듭나지 않으면 진리로 부터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 오늘날『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라고 말하는 믿음에 대해서 갈라디아서 3장 23절에서 설명한다.『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처음 교회에 나와서 예수 믿겠다고 고백하고 신앙생활을 하면 율법적인 생활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이렇게 하면 죄인가? 저렇게 하면 죄가 안되는가?』 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죄의 유무는 법의 규정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마음 뿌리에 달려있는 것이다. 법의 규정을 생각하는 것이 바로 율법적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율법 속에서 인간은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여 그 죄의 뿌리를 죽이라는 말씀이다. 죄의 뿌리가 바로 육적 자아다. 그래서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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