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린도전서 15장 30-31절『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13장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15장에 대해서는 부활을 설명한다. 그리고 15장 마지막에 이 말씀을 했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안에 있는 자는 함께 죽었고, 함께 부활했으며, 함께 하늘에 앉히운 바 되었다.
로마서 7:4에는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라고 하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줄을 믿노니라고』(롬6:8) 하였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2:6) 라고 하셨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심을 확증하게 되며』(고후13:5),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였듯이 내 안에 천국이 있으며(눅17:21) 부활의 능력을 듣고 알고 믿는다면, 살고자 하는 길로 가지 않을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의 능력과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라고 말했다. 현재적으로 늘 알고자 했다. 우리도 매일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소원을 가져야만 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그 분을 알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부활의 능력과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한다. 예수님이 정말 나를 위해 죽었다면 그 분의 고난을 알고자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외식과 모순에 빠져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회개해야만 살 수 있다.
바울 서신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렇게 살고자 하여 그렇게 보는 사람은 극히 적을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구원이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것이지 바울처럼 살고자 하는 자는 적을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바리새인의 누룩, 외식(위선, 모순)이 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고백했다. 날마다 죽지 않으면 날마다 부활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용모를 알아볼 수 없게 되셨는데,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 마다 제자들은 알아보지 못했다. 주님은 손에 못자국과 옆구리 창자국을 남겨두셨다. 아무리 우리가 영적으로 변화되었다고 말해도, 예수님의 못자국과 창자국이 없는 자는 구원을 받은 적이 없다. 어떠한 영성도 십자가의 흔적을 지울 수는 없다. 가나안에 들어가도 초막에 거하게 하신다.『일년에 한번씩 초막에 거하라, 너희 성공의 집, 안락한 집에 마음을 두지 말라』는 것이다. 광야에 초막을 치고 살았던 것을 잊지 말라고 하셨다.『날마다 죽노라』라는 소원이 있어야만 이 글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 속에 이 말씀이 생명이 되고, 날마다 죽노라 하는 그 자리를 찾고자 해야만 한다. 날마다 그 자리를 찾는 자는 우리를 주관하는 생명이 영의 생명인지 혼의 생명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혼의 생명은『날마다 살리라』가 된다. 어떻게 하면 더 편하고 만족스러운 길, 더 좋은 길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그게 육신이다. 육신의 생각은 반드시 죽는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육신의 생각은 내가 편하고자 한다. 모든 것이 나의 중심이다. 예수님이『내가 이 땅에 온 것은 대속물로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라고 복음을 말해도, 육의 사람들은 베드로처럼『그리 마옵소서 결단코 이 일이 당신에게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16장 23절에서『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네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예수님과 매일 같이 다닌 베드로처럼, 육에 머물고 있다면 변하지 않은 것이다. 그저 사람의 일을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육신에 불과한 존재인 것이다. 우리의 육신은 십자가에 죽은 예수와 연합될 때만 처리된다. 장사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아무리 성경의 지식이 높고, 평생 기적을 경험해도 육신은 처리되지 않는다.
16장 24절에서『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쫒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혼)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혼)을 잃으면 찾으리라』이게 구원이다. 우리의 모든 생각, 선택, 의견이 혼으로 부터 나오면 멸망하게 된다. 그런데 『그 내용이 맞는가 틀렸는가』를 생각한면서 산다면 스스로를 속이게 된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삼년간 같이 살았지만 육신의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구원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되는 장사의 과정을 거쳐야만 살 수 있다.『아버지께서 이끌지 않으시면 내게로 올 자가 없느니라』회개하고 자기부인이 없으면 장사의 과정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다.
십자가에 죽기 전에 예수님이 다시 확인하셨다. 『조금 있으면 내가 가는 길에 너희들은 올 수 없다. 그런데 잠시 후에는 올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주님이 제자들에게『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셨지만, 십자가 앞에서는『지금은 따를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모두 다 나를 버리리라』라고 말씀하셨다. 모든 것이 구원을 위한 회개의 기회이다. 베드로는 『나는 죽기까지 따르겠나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다 도망가버렸다. 육의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를 수 없다. 열매를 보고 우리가 어떤 나무인지를 깨달아야만 살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을 깨닫고 회개해야만 살 수 있는 것이다. 회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성령으로 거듭난 생명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회개하는 자는 구원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나 때문에 죽으신 예수의 십자가를 따르는 자가 된다.『날마다 죽노라』가 된다. 누가복음에는『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쫒으라』고 말씀했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택하시고, 이 말씀을 하셨다.『너희들 내가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느냐, 나는 세상에 검을 던지러 왔노라』,『집안 식구가 자기의 원수가 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육적 생각을 포기하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사람들은『그것은 제자들이 하는 일이고,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라고 말한다. 회개하지 않은 자의 모습이다. 제자가 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제자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은 자는 제자가 되기는 너무 힘들고 교회 다니면서 성화되는 것을 생각한다. 살다가 보면 서서히 조금씩 성화되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상태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성령충만, 영적 체험 등을 추구한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자기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을 찾는다. 회개하는 자는『나는 날마다 죽노라』가 전부라는 것을 깨닫는다. 회개하는 자에게 거듭나게 하신다. 그래서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 회개가 전부다. 회개 위에 무엇인가를 세우는 것이지, 회개없이는 세울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전서가 끝나가는 무렵에『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말이 우리의 영적 양식이 되고, 회개로 나가는 길이 되어야만 한다. 로마서 8장 5절에서『육신을 쫒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쫒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광야에서는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한다. 광야에서는 매일 맛나를 먹고 구름기둥 불기둥 따르고 예배드리고, 그러나 가나안을 정탐한 후에 드러나게 된다. 하나님은 열두정탐꾼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을 하셨다. 그러나 열정탐꾼과 그들의 말을 믿었던 약 60만명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했다. 오늘날도『자기 십자가를 지면 구원의 문에 들어선다』고 말하지만, 대부분 열정탐꾼처럼『들어가면 죽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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