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나를 믿는다고(2)


『돌이킨다』는 말은 에피스트로퍼(be converted: 우리말로 회심이라고 번역됨), 돌이켜야 거듭난다는 말이다. 베드로는『예수님을 위해 죽는다』고 말했지만 예수님은『너 나를 버리고 도망갈 거야』라고 말하는 것이다. 누가 거짓말을 하는가? 베드로는 예수를 속일 생각은 없었지만 결국 거짓말을 한 것이다.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세번 부인했다. 그리고 닭이 울었다. 그 때서야 예수님이 하신 말이 생각났던 것이다.

누가복음 22장 60-62절에서『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예수님이『너희들 나를 부인하리라』라고 말한지 몇시간도 안된 일이다. 베드로는 몇시간도 안되었는데, 세번 부인하는 동안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이 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를 불쌍히 여길 것이 아니라, 우리도 이 같은 상황이면 예수님을 부인할 자라는 것을 깨달아야만 회개할 수 있다. 우리도『주와 함께 죽을지라도 절대 부인하지 않습니다』라고 결심할지도 모른다.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결심한다면 우리가 얼마나 자신의 힘으로 믿음을 쌓고 있는지를 깨달아야만 한다. 그 깨닫는 것은 주님의 얼굴과 베드로의 얼굴이 마주쳤을 때 비로소 깨닫는 것 처럼, 주님의 거룩하신 빛이 비춰져야만 우리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주님을 배반할 자라는 것을 고백하는 자가 되어야만 회개할 수 있는 은혜를 받을 수 있다. 그래서 그 육적인 것이 죽으라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사탄의 머리가 깨어진 것 처럼, 내 속에 있는 옛사람이 깨어져야만 한다. 우리도 베드로처럼『주님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습니다』라고 고백한다 할지라도,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가 쌓은 믿음에 불과하다.

마가복음 4장 12절에서『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예수님은 네가지 밭의 비유를 하면서 길가밭, 돌짝밭, 가시떨기 밭을 말씀하셨다. 길가 밭은 기경을 해서 파헤쳐버리고, 돌짝은 제하고, 가시떨기 밭은 기경해서 가시를 뽑아버리라고 말한다. 회개하기 전에는『죄인들이 죄사함을 받을까』주님이 염려한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삼년간 예수님을 따른 것은 기적과 말씀에 감동받아서 따른 것에 불과한 것이다.

『내가 죽을 죄인이구나』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우리 속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것은 조금도 없다. 입은 거짓말에 능하고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며, 독사의 독이 가득한 자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회개의 시작이다. 자기를 신뢰하는 자는 회개하지 못한다. 베드로가 십자가 앞에서 도망간 것도 결국 자기를 신뢰하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왜 죽었는가를 깨닫는 것이 바로『내가 죽어야 할 그 곳이 바로 예수가 죽은 그 십자가구나』를 깨닫는 것이다. 이것이 회개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율법이 죽인 예수 그리스도, 그 앞에 설 때 우리도 율법에서 죽는 자가 된다. 예수님을 믿어서 100%를 하나님께 드리던가 아니면 0%도 드리지 않던가 둘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중간은 없다. 완전히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면 100%를 드린 것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율법에서 죽은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길이다. 인간들 속에는 죽지 않으려는 육적인 본능이 존재하는 것이다. 열정탐꾼처럼 들어가면 죽는다고 생각하는 육적 본능이 있다.

육의 본능대로 생각하고 살아간다면 그리스도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가 될 것이다. 육의 본능대로 살아간다면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생명이 된다. 열정탐꾼의 말을 믿은 사람들은 모세를 돌로 쳐 죽이려고 했다. 모세는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선지자였다. 육적 본능대로 사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소개하려는 선지자를 가나안 앞에서 죽이는 자가 된다. 가나안은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주님은 육신대로 사는 사람들은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맹세하셨다.『너희들은 가나안에 절대 들어가지 못한다』고 맹세하셨다.

회개하여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는 거듭난 자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자가 된다. 내가 주인이기 때문이다. 내가 주인인 사람은 아낙자손을 바라보는 순간『이제 죽었구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에서 에스더는『죽으면 죽으리라』라고 말하면서 왕의 뜰로 나갔던 왕비였지만, 들어가는 순간 주님을 만나게 된다. 왕은『이 뜰에 들어오는 자는 다 죽는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에스더가 뜰에 들어가는 순간, 왕은 자기가 만든 법에서 벗어나버린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신 것이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보면 그곳에 들어가면 죽는 길인데, 주님이 보시기에는 그곳이 백성들을 살리는 곳이였다.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모든 이야기는『죽으면 죽으리라』는 말씀으로 통한다. 죽음의 계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는 99세에가 될 때 그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우편강도처럼 몇시간 만에 찾아올 수도 있지만, 아브라함은 25년만에 찾아왔다. 이와 같이 십자가에서 나 때문에 그리스도가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죽음의 계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함께 장사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가 나에게 있는 것이다. 그 이유가 나에게 있는데, 예수님은 죽으시고, 나는 죽지 않는 오늘의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되는 것만이 구원받을 수 있는 믿음이 된다. 옛사람이 장사되어야만 구원받는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신다. 내가 결단하는 문제가 아니라, 내가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이다.

2000년 전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죽음과 2000년 후의 오늘을 사는 우리의 옛사람이 죽는 죽음과 합하여지는 것이다. 그 일을 세례받은 자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이 해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는 물에서 죽고,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을 말한다. 마술쟁이 시몬이 세례받았지만 베드로가『악독이 가득한 자』라고 말했다. 회개하지 않고 세례받은 자는 다 이런 상태라는 것을 말해준다. 회개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일이다. 회개는 옛사람이 죽는 것을 말한다. 이 땅에서 나타나는 모든 사건들은 내가 주인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모든 사건들 속에서 회개의 기회를 잡아야만 한다. 회개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모습을 발견하고, 나의 옛사람이 장사되는 기회를 잡는 것이다. 회개하는 자는 날마다 죽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 길만이 좁은 길이다.
좁은 길은 옛사람이 죽고자 하는 길이다.

마태복음 17장 13-21절에서『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아버지의 뜻에 대해서는 요한복음 6장 38-40절에서『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아들을 보고 믿는 자는 다름 아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를 말한다. 로마서 6장 4절에서 처럼『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혼과 영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하며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