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20장 31절에서『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열두제자 중 마지막으로 도마도 만나주셨다. 20장 25절에서 도마는『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우리도 바로 도마와 같은 자들이 될 수 있다. 우리도 육의 눈으로 보면, 보지 않고는 믿을 능력이 전혀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29절에서『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도마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을 믿는다고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다. 생명을 얻는 것이 복된 자들이다. 믿는 것은 체험되는 일이다. 어떤 체험인가? 성경에서 인생의 문제가 있을 때 주님을 찾는다. 구약에서 주님은 사람들을 체험하게 해 주신다. 병이 낫고, 귀신이 떠나가는 일들이 체험되었다. 그러나 체험이 구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구원의 기회가 시작되는 것이다. 제자들도 온갖 체험을 다 했지만, 예수님이 죽었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신다는 말은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그리고『오늘밤 다 나를 버리리라』라고 말씀하셨다.『우리는 주와 함께 감옥에 갈지언정 주를 버리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변화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예수를 믿는다고 말을 해도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아무리 기적을 체험해도 변화되지 않으면 다 예수를 버리는 삶이 된다. 변화되는 삶은 못박히신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일이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되는 일은 구약에서 말하는 성전의 놋제단과 같은 것이다. 놋제단을 통과하지 않으면 성전에 들어갈 수 없다. 놋제단은 하나님의 진노를 표현하는 곳이고, 죽음을 나타낸다. 짐승들이 다 죽어야만 성전에 들어갈 수 있다. 짐승들이 죽었다는 것은 죄인들이 죽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오늘날 교회도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안에 들어가야 한다. 죄인들이 죽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예수님 당시에 열두제자 중 가장 열심이었던 베드로도 예수님의 죽음앞에서는 안되는 것이다. 베드로는 세번 부인한 후 밖으로 나가 통곡했다. 뭘 회개했는가? 세번 거짓말한 죄를 회개했는가? 베드로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굳게 믿었지만, 결국 그 믿음은 예수를 부인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베드로가 믿는 믿음의 실체는 무엇인가? 자신이 결단해서 믿는 믿음은 다 이렇게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결단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자기가 믿는 믿음이라는 것이다. 많은 교회 사람들은『자기가 믿지 누가 믿는가?』라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여기서『자기』라는 정체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나를 따를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자기가 왜 자기를 부인하는가? 이 때 자기는 육으로 비롯된『자기』라는 정체성을 말해준다. 베드로가 붙잡히신 예수 앞에서 도망가버린 자기도 육으로 비롯된『자기』인 것이다. 온갖 기적을 경험하고 체험해도 육으로 비롯된 자기(혼)는 죽음 앞에서는 다 도망가는 것이다. 육으로 비롯된 자기를 부인하면 하나님이 생명을 주셔서 죽었던 영을 부활시켜 주신다. 이때 영으로 비롯된 마음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을 또 다른 자기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은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또 다른 자기(영)인 것이다. 어느 것이 구원받는 자기인가? 구원받는 자기는 혼이 아니라 영이다. 회개하는 자의 죽었던 영을 하나님이 살리셔서 영이 구원받는다.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회개하는 자는 육의 자기(혼)를 부인하는 자가 된다. 그래서 회개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혼은『지,정,의』라고도 말한다. 자기의 지식과 경험, 감정, 자기의 의지와 결단, 이런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버리라는 것이다. 오직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행하는 것이다. 육의 자기(혼)는 율법 아래 있는 존재들이다. 갇혀있는 자들이 된다. 율법은 죄와 사망의 법이다. 그래서 여전히 죄인이다. 그러나 영은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난 자들이므로『성령의 법』에 따른다. 자유함을 얻는 자가 된다. 로마서 8장 1-2절에서『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즉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회개는 인간의 전적타락, 육으로 따라 사는 자인 것을 고백하고 돌이키는 것이다. 육으로 산다는 것은 곧 허물(세상죄)과 죄(원죄:악)로 죽어있는 자라는 것이다. 내 속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는 악한 존재라는 것이 전적타락이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사람이 어려서부터 계획함이 악하다』고 했다. 그래서 모든 인간들을 지면에서 물로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회개는 인간이 이런 존재임을 깨닫고 돌이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회개는 어떤가? 베드로처럼 예수를 세번 부인한 것 때문에 회개하는 자가 되고 있는지, 십자가의 예수 앞에서 도망간 것 때문에 회개하는지 고민해야만 하는 것이다. 세번 부인한 그것 때문에 회개한다면, 육으로 비롯된 자기(혼)가 죽지 않았는데, 그 회개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자기(혼)를 더 믿는 사람은 회개하지 않는 자들이다. 옛생명이다. 하늘로부터 오는 새생명을 얻지 못한 자가 된다. 육의 마음으로 예수를 믿는 자들은 어려움이 오면 다 흩어지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6장 30-32절에서『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너희가『믿는냐』라는 말은 너희가『믿는다고?』라는 말이다.

육의 눈으로 믿는 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믿는 자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옛생명(혼)과 새생명(영)은 가나안땅 앞에서 나타난다. 옛사람으로 표현된 옛생명은 광야에서 다 죽는 것이다. 그러나 새생명은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믿음이다. 열정탐꾼과 애굽으로부터 나온 모든 히브리 백성들은 다 옛사람이었다. 그러나 두 정탐꾼인 여호수아(헬라어:예수)와 갈렙, 그리고 광야에서 태어난 자들만 가나안으로 들어갔다. 열정탐꾼은 아낙자손을 보고 두려워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 잊어버린 것이다. 두려움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버리게 된다.

하나님은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서『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말씀하셨다.
야곱도 라반 집에서 나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형 에서를 만날 것을 두려워했다. 얍복강까지 왔지만 두려워서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사람들이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내가 주인인 삶을 살고 있다면, 열정탐꾼과 같은 자들이며, 야곱과 같이 형 에서가 무서워서 강을 건너지 못하는 자가 된다. 어떤 상황을 맞이했을 때 이것을 자신의 어떤 상황을 알게되는 것이다. 재정의 문제, 건강의 문제, 가정의 문제가 앞을 가로 막을 때 자기를 신뢰하는 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있는지 알게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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