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과 자기의 의


갈라디아서 3장 22-23절『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히브리 백성을 애굽에 가두어 둔 것처럼,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 그들은 스스로 바로왕의 노예로 부터 나올 수 없었다. 하나님이 그렇게 허용하신 것이다. 모든 인간은 사탄의 노예가 되어 스스로 나올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허용하신 것이다. 인간의 상태가 그렇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결단하여, 예수믿기로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히브리 백성이 애굽왕의 지배아래 있어 노예가 되었는데, 스스로 생각하기를『우리는 자유인이라』고 생각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은 죄 아래 가두어져 있으므로, 스스로 그 감옥 같은 그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주인이 풀어주지 않으면 절대 불가능하다. 그래서 주인이 바뀌어야 된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허용한 지배를 피값을 주고 다시 사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를 사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약속하시는 것이다.『회개한 자를 사탄으로부터 사서 나의 백성이 되게 해 주겠다』고 약속이다. 이 약속의 말씀이 믿음으로 다가와야만 한다. 믿음이 오지 않으면, 여전히 율법 아래 갇혀있는 것이다. 믿음이 오지 않으면 약속을 받아드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약속을 받아드리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조건에 반응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조건은 노예의 옷을 벗고, 애굽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사형수가 되어 감옥에 들어간 자는 법 조문에 묶여 감옥으로부터 나올 수 없게 된다. 죽어야 나오는 것이다. 로마서 1장 18-31절에서는 사형에 해당되는 죄악에 대해서 열거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하여 의인이 아닌 모든 사람들이 1장 32절에서 사형에 해당된다고 말한다. 모든 사람들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그래서 죽어야 나오는 것이다. 로마서 6장 7절에서처럼, 죽으면 죄 없음이 되고 감옥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로마서 6장 2-6절은 세례를 설명하고 있다. 세례는 죄를 씻는 것이 아니라, 옛사람의 죽음을 나타내는 의식이다. 6장 4절에서『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이전의 것에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75세에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친척 롯을 데리고 나온다. 약속의 자녀를 주겠다고 말씀하시지만 이스마엘을 낳았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99세 때에『내년에 약속의 자녀를 주겠다』고 말하는데도 속으로 웃었다. 이전의 것에서 완전히 벗어나는데 25년이 소요된 것이다. 로마서 4장 19절에서『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그래서 4장 23-24절에서『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믿기만 하면 의로 여기심을 받는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브라함이 자기의 몸이 죽은 것 같이 되는 것처럼, 믿는 자는 예수와 함께 죽은 자가 되어야 의로 여기심을 받는 것이다. 믿음은 쌍방간 약속의 이행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우상을 버리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에게 우상은 무엇인가? 권력, 명예, 돈, 자녀, 그러나 그 우상은 자아다. 자아의 내면에 숨겨진 탐욕이라는 우상이다. 권력, 명예, 돈, 자녀의 문제는 탐욕이라는 우상이 사람의 행동으로 나타나서 표현된 것 뿐이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7장 24-27절에서『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이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유는 여자의 자아를 무너뜨리기 위함이었다. 7장 28절에서『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자아를 버리지 않으면 이런 말이 나올 수 없다. 그때 예수님이 마태복음 15장 28절에서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이 믿음을 위해 예수님은 여인의 자아를 죽이도록 유도하셨다. 자아를 죽이는 것이 회개다. 회개없는 믿음은 없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을 하지만, 그 믿음이 자기의 생각대로 믿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믿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자기의 생각대로 믿는다면 여전히 율법 아래 있는 것이다. 자기 생각대로 믿는 것은 여전히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육신에 있는 것이다. 세상의 육신에 머물고 있으면 아무리 오래 교회 생활해도 율법의 사고를 벗어날 수 없게된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믿는다면 말씀 앞에서 자아를 부인해야만 한다. 신령한 몸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고 말을 해도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육신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자아가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자녀를 주겠다고 말씀해도, 자아가 처리되지 않는 모습을 본다. 자아가 처리되지 않으면, 남들이 보기에는 잘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믿음이 없는 것이다. 이성과 지식과 경험이 적용되지 않는 부분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 그 상황이 올 때 믿음의 상황이 나타나게 된다.

로마서 4장 19-22절에서『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구원은 100세가 되어 이삭과 같은 새생명을 얻는 것이다. 로마서 4장 3절에서『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믿는다는 말 때문에 오해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여기에서 믿음은 아브라함의 75세 때의 믿음이 아니라, 백세 때의 믿음이다.『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가 중요하다. 창세기 15장 4절에서『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그 사람은『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다. 다메섹은 갈대아 우르의 바벨론을 말한다.

15장 4-6절에서『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여기에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많은 사람들의 믿음이 여기에 이르는 것이다. 아브람『자신의 의』로는 믿음에 이르지 못한다.『그의 의』라는 것은 아브람 자신의 의를 말한다. 하나님이 주시는『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가 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16장 2절로 가면『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오늘날 많은 교회 사람들이 이 상태가 되는 것이다. 자기의 의에 빠져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고 말하고 있다. 사람들이 왜 자기의 의에 빠져나오지 못하는가? 자아를 하나님 말씀 앞에 세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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