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장 5절『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니고데모는 당시에 높은 위치의 랍비였으며, 예수는 30대 청년이었다. 그런데, 그가 밤에 몰래 예수를 찾아와『랍비여』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 예수가 하나님에게로 부터 왔다는 것을 알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랍비로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는 니고데모에게『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다시 태어나는 것은 육체의 부모가 아니라, 하나님에게로부터 태어나야만 한다는 것이다. 니고데모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다시 태어나는 것은 육체가 죽어서, 환생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비록 육체가 살아있지만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다. 그래서 오늘날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마음의 상태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마음이 아니라, 영의 몸이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육의 몸이 아니라 영의 몸이 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44절에서『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영의 몸은 혈통으로 난 것이 아니다. 육체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이 믿지 않으나, 영의 몸이 있는 것이다.
영은 부모로부터 받은 육에서는 죽어있지만, 다시 영의 몸으로 태어날 때 영이 살아나는 것이다. 영이 육에 있는 것은 그물에 갇혀 있는 물고기처럼, 갇혀 있는 것이다. 영은 영의 몸을 입어야만 한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데, 물은 육의 몸이 죽었음을 의미한다. 노아의 시대에 살았더라면 물에 빠져 죽었을 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죽은 자라는 것을 믿고, 성령으로 영의 몸이 태어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육은 마치 나무에 접붙이기를 해서, 이전의 가지는 붙어있기는 하지만 죽어있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이 세상의 육체가 있음에도 다시 태어나라는 것인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이다. 이 땅에서 다시 태어난 자를 통해서 사탄의 권세를 무너뜨리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전의 육체 속에 있는 수많은 기억들이 현존하지만, 하나님 말씀 앞에서 이를 부정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날마다 싸워이겨야 한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날마다 죽노라』를 기억하며, 깨어 있어야만 이길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의식이 부모로부터 받은 육체의 기억 속에 있을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주시는 영의 몸에 있을 것인가? 날마다 십자가를 부여잡지 않으면 넘어질 것이다.
새로 다시 태어난 영의 몸은 성령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요한1서 3장 9절과 5장 18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탄이 접근할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우편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 태어난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래서 십자가에 예수와 함께 못박은 이 현실적인 육을 위해서 살아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육의 생각이 영의 생각을 끊임없이 차단하려고 사탄은 온갖 방법을 동원한다. 그 중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 바로 미디어일 것이다. 사탄은 끊임없이 미디어를 통해서 혈통으로 육정으로 묶이도록 유도한다. 다시 태어난 거듭난 자는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가짜 복음이 성행하고 있다. 예수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거나, 예수를 영접하면 그리스도가 영접하는 자 안에 들어온다는 식이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혈통으로 이루어진 곳에서는 하나님 나라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가족간에 불화가 먼저 일어난다. 마태복음 10장 35-39절에서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하나님 나라는 혈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귀절을 이용, 혈통의 분쟁을 통해 기독교인들을 넘어뜨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자식이 기독교인 아버지를 고발하고,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독재국가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혈통으로 종교 분쟁이 일어나지만, 이로 인해서, 기독교인들은 고발당하지, 고발하는 자는 없다. 중세 때나 그런 일이 있었지만, 오늘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가족간에 기독인들을 공격하는 패턴은 우상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우상을 지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서 기독인을 공격하는 것이다. 그들이 섬기는 모든 것이 우상이다. 우상을 섬기는 자는 죽어 있는 자다. 우상을 섬기는 자는 사탄의 권세 아래 있는 자들이다.
에베소서 2장 1절에서『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세상 풍속을 따르는 자들은 사탄의 자식들이다. 세상 풍속을 따르는 자들에 대해서, 에베소서 2장 3절에서 말한다.『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세상 풍속을 따르는 것이 육체가 원하는 것을 한다는 것이다. 육체가 원하는 것을 따르는 자들은 진노의 자녀들이다. 그러나 회개하여, 다시 영의 몸으로 태어난 자는 영이 원하는 것을 따른다. 자신이 진노의 자녀인 것을 깨닫는 자가 회개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생활을 해도, 여전히 사탄의 지배하에 있는 것이다. 교회 생활하면서, 육이 원하는 것을 위해 살아간다면 진노의 자녀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육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고민해야만 한다.
오늘날 육이 원하는 것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가? 가장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재물에 대한 탐심일 것이다. 시내산에서 모세가 십계명의 돌판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내려오던 중에, 백성들은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절하고 춤추며, 우상에게 절하고 있었다. 황금 송아지가 바로 우상이라는 뜻이다.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구원일 것이다. 교회 안에 에덴동산의 숲처럼 숨어있는 곳이 될 수 있으며, 무화과 나무의 잎처럼 감출 수는 있어도, 결국 두려우신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는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예배는 회개하지 않은 자들이 부담없이 앉아서 하는 의식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이 형식적 의식에서 깨어나지 않으면 다시 태어나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이 인간들에게『다시 태어나라』고 하신 말씀은『모든 인간이허물과 죄로 죽어 있어서 수선이 불가능한 존재』라는 것을 말해주신다. 죄는 원죄를 말하지만, 허물은 세상죄를 말한다. 부모로부터 죄성을 물려받을 뿐만 아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세상에서 계속 죄를 짓는 그런 존재라는 것이다. 예배는 사람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예배다. 그래서 예배를 통해, 자신이 예수와 함께 죽은 자임을 다시 한번 고백하고 확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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