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나는 믿음은 회개를 틍해서만 가능하다


요한복음 20장 31절『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의 이야기다. 부활하심을 제자들은 도마까지 다 목격했다.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진 후의 이야기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부르심의 은혜를 받은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가 수많은 기적을 체험했다. 그러나 베드로가 물위를 걷다가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풍랑을 바라보다가 물에 빠진 것이다. 주님 만을 바라보는 것이 생명을 얻는 것이요 택하심을 입는 것이다. 제자들은 물위의 예수님과 베드로와 풍랑과 물에 빠지는 모습, 예수님이 물에 빠진 베드로를 건지는 모습을 보았다. 관찰자의 모습들이다. 관찰자들은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관찰자는 주인공이 아니다. 택한 자들은 관중이 아니라 마치 야구장에서 타석에 들어선 타자처럼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14장에서『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라고 하시고, 16장에서는『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라고 말했는데, 16장 32절에서『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부르심을 입은 자와 택하심을 받는 자의 사이에는 회개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부르심을 입었지만, 부르심을 입은 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일방적 언약을 지키지 못함을 알게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조건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부르심을 입은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참여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택함을 입는 것이다. 부르심을 입었다고, 교회에 인도되어 예수를 영접했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연합되는 자만 택하심을 입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참여하지 않는 자는 마가복음 4장 12절에서 하나님이『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이는 이사야서를 인용하는 말씀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반응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하지 않아서 하나님이 바벨론으로 끌려가도록 하셨다.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오히려 깨닫지 못하게 하신다. 회개하지 않으면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회개하는 것이 돌이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부르심을 입은 자와 택하심을 입은 자가 혼재하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같은 교회 안에 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참여하는 자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바라보는 자로 나뉘어지기 때문이다. 야구장에서 관중과 야구장에서의 선수로 나뉘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거듭난 자와 거듭나지 않은 자가 그렇다. 예수님의 죽으심 앞에서 선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의 죽으심 앞에서 다 도망가버렸다. 회개하지 않으면 그의 죽으심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다. 

옛생명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지만, 주인은 자기라는 것이다. 이게 육신이다. 육신은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 교회 안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믿음을 가지고 있다. 거듭나지 않은 자는 자기를 믿는 것이다. 구원은 누가 주인인가이다. 누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가이다. 택함을 입는 자는 요한복음 20장 31절에서『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가 된다. 이게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하는 것이다.『그 이름을 힘입어』라는 말은『그 이름 안에서』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그리스도 이름 안에서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내지 않으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되지 않는다. 새생명을 얻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낸바 되어야 한다고 로마서 6장 4절에서 말한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내어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는 자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 그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교회에 인도되어 예수를 영접하면 구원받는다고 말하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내지 않으면,그 영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불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가짜 복음이 양산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1장 13절에서『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낸 자가 하나님께로 난 새생명이 된다. 이게 진리의 말씀이다. 예수님은『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라고 하셨다. 이런 말씀들은 요한복음에만 나온다. 요한복음은 거듭난 자에게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 하시는 말씀을 주로 이룬다. 그래서 회개라는 말이 계속 언급되지만, 진리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진리』라는 말이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택하심을 입은 자에게 주로 말하는 것이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초막절에 관한 말이 나오지 않지만 요한복음에만 초막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들에게 요한복음의 말씀을 먼저 말한다면 신앙적으로 위험하게 된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고, 그 이름을 힙입어 생명을 얻어야만 구원받는다.『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고』부르심을 입은 자가 된다.『그 이름을 힙입어 생명을 얻어』가 택하심을 입은 자가 된다. 그 사이에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내는 것이 있다. 그의 죽으심을 구경하는 자와 참여하는 자는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자기의 모습을 바라보는 자가 된다. 죽은 어린양을 바라보는 자와 죽은 어린양과 연합되는 자는 분명히 다르다. 돌이키는 것은 바로 바라보는 자가 연합되는 것으로 돌이킨다는 것이다. 

레위기에 성전 안에 쓰이는 떡은 꿀을 넣으면 안된다고 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꿀을 바르는 말씀이 아니라, 들어서 쓰디쓴 말씀으로 다가와야만 한다. 감동적인 간증, 기적의 표적이 나타나는 말씀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낸바 되는 말씀과 열매맺는 말씀이 필요하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산떡에 인간들이 꿀을 바르는 것이다. 그 산떡은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예수가 아니라 버림받은 십자가의 예수님이신 것이다. 십자가의 예수를 붙잡지 않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 육이 살아있을 때는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구원의 길이다. 그래서 죽은 자같이 되는 것이다.

『예수의 이름을 힙입어』는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는 십자가에서 못박힌 예수의 이름이다. 바울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것으로 작정했다고 고백한다. 이게 회개하는 자가 된다. 회개하지 않으면 그 이름을 힙입어 생명을 얻을 수 없게 된다. 회개하지 않으면 롯의 처와 같이 되는 것이다. 롯의 처 이야기에서 천사가『뒤돌아보지 말고, 머물지 말고, 내가 지시한 성으로 가라』는 말에 반응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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