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고린도후서 4장 1-7절)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4장은 3장에 이어 하나님의 영광이 율법이나 사람에게 있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음을 설명한다. 고린도교회에 바울의 가르침과 사역에 오해를 갖고 대항하던 자들은 유대의 전통을 따라 율법을 지켜야한다고 주장하던 이들로 여전히 율법에 매여 그리스도인의 규범(음식, 성, 결혼, 그리고 법적 소송 등)은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채, 고린도의 개방된 문화 속에서 근친상간 죄를 범한 자들이었다. 사실, 바울은 이러한 복잡한 문제들로 인해 고린도 교회에 2차방문을 했었다. 누가도 사도행전에 기록하지 않았지만 고린도후서 (12:14; 13:1-2)에 세번째 방문이라 언급함으로 가슴아픈 방문이 있었음을 유추 할 수 있다.

 특별히, 가슴 아픈 방문이었기에 다시는 가지 않기로 결심까지 했었던 차였다. 그로 인해, 사도바울은 디도를 교회에 보내 일어나는 일을 자세히 알아보면서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에베소에서 고린도전서를 쓴 바울은 드로아에 가서 디도의 소식을 듣기 위해 기다렸다. 엎친데 겹친 격으로, 디도의 도착이 늦어지자, 마게도니아까지 바울은 이동하여 기다렸다. 결국 마게도니아에서 디도를 만나 고린도교회에 있던 문제들에 대한 해결과 바울에 대항 했던 이들에 대한 돌이킴과 회개에 대한 소식을 듣고 3차 전도여행 기간 중에 마게도니아에서 고린도후서를 쓴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바울은 4장을 통해 비록 2차방문 때 받은 수많은 모함과 상처에도 불구하고 3장에 이어 부드러운 표현을 통해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은혜와 사명을 재정립하도록 도움으로 아픔과 상처를 아름답게 승화시킨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여기서 직분은 새 언약의 일꾼을 가리킨다. 직분은 섬긴다 또는 봉사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직분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입은 자들에게 주신 사명이다. 자신이 은혜와 직분의 주인이 되면 이는 거짓이며, 복음을 가리는 것이며,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비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단호하게 직분의 목적을 정의한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이를 통해 바울은 은혜와 직분의 주인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한다. 

둘째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질그릇은 흙으로 만든 그릇이다. 잘 구워서 값이 나가는 도자기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계속 사용하려는 용도로 만든 용기를 말한다. 그런데 이 질그릇에 보배가 담겨있다. 일차적으로 『우리』는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을 말한다. 하지만 그들 뿐 아니라 『이 직분』을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여기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먼저, 바울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자신을 질그릇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겸손의 표현인 것 같다. 바울은 많이 배우기도 하고 열정도 있었고 유대 사회에서 인정 받을 수 있는 좋은 배경도 있었지만, 그 자신의 연약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대적들은 바울이 글은 잘 쓰는데 말에는 힘이 없다고 비난했다. 

바울도 딱히 그것을 반박하지 않았다. 말에 힘이 없다는 것은 특히 당시에 인정받던 그런 웅변술에 능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들의 기준에서 바울의 설교는 형편없었던 것이다.
바울을 깎아 내리려는 자들은 이런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렇게 바울을 비난하고 공격했다. 그것에 대해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을 인정했다. 자신이 질그릇임을 인정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질그릇에 보물을 담을 수 없으니 바울에게는 참된 보물이 없다고 공격을 했다. 바울은 질그릇이었다. 우리도 질그릇이다. 강하지 않고 지혜롭지 않다. 천하고 멸시 받고 자랑할 만한 것이 없다. 죄에 넘어지는 자들이다. 바울은 이런 질그릇인 우리가 보배를 가졌다고 말한다.
이 보배는 4장 1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았다』고 말했다. 즉, 이 보배는 우리가 받은 이 직분이다. 이 직분이 보배인 이유는 영광스러운 새 언약의 직분이기 때문이다. 새 언약이 영광스러운 이유는 그것이 바로 주의 영광을 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주의 영광은 곧 하나님의 영광이다. 결국 이 직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 즉 복음의 빛을 전하는 직분이기에 보배다.
하나님은 질그릇에 보배를 두셨다. 그 이유는 우리가 약한 이유다.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통해 한 사람이 구원 받고 그의 삶이 변화된다. 죄를 기뻐하고 죄에 물들어 죄에 종이 되어 살던 사람이 이제는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에 대하여 죽었던 자들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바울은 그것을 심히 큰 능력이라고 표현한다. 이 능력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다. 어두움 가운데 빛이 비취게 하는 능력이다. 이 놀라운 능력이 이루는 일들을 볼 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 능력의 원천, 근원이 어디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런 힘은 질그릇인 바울에게서 나올 수 없다. 그에게는 그럴 만한 힘도 없고 지혜도 없다. 그런 영향력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전한 복음을 통해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변화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 일은 분명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이것이 바울의 자기 변호였다. 자신의 약함을 공격하는 자들에게 실제로 자신이 약함을 인정했다. 그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약함은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낸다. 오직 하나님만 이 놀라운 구원의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명백히 드러낸다. 여러모로 뛰어난 사람이라면 사람들이 변하는 것이 그 사람 덕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약함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임을 증명했다. 그의 약함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 필요했다.

하나님께 능력이 부족해서 그 부족함을 채워줄 능력 있는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 이미 사람을 구원할 모든 능력은 하나님께 있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드러내느냐다. 하나님은 질그릇에 보배를 두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신다.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히 큰 능력을 보이신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바울의 약함을 사용하셨고 다른 믿음의 선진들을 사용하셨고 우리의 약함을 사용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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