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유다서 1장 1-5절)『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너희가 본래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1장 1절『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아가페)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예수 크리스트 테테로 메노이스)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우리말 번역에는 『사랑을 얻고』로 표현되어 있으나, 영어성경 kjv 에는『them that are sanctified by God the Father』, 여기서, 『사랑을 얻고』가 아니라 『be sanctified』이다. 『죽음을 당하신』으로 번역되는 것이 맞는 말이다. 그리고 테테로 메노이스는 『의하여』 라는 의미를 갖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는 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지키심을 받는 자가 된다.
1장 3절『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하팍스) 주신 믿음(피스테이)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유다가 구원의 일반적인 내용을 전하려고 하다가 어떤 문제로 인하여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으로 힘써 싸울 것을 권면하는 편지를 씨게 된 것이다. 단번에 주신 믿음에서 믿음은 헬라어 피스테이 이다. 피스테이는 어떤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성령의 감동으로 마음에 믿음이 자리잡는 그 믿음을 의미한다. 유다서의 가장 핵심은 바로 이 믿음을 의미한다.
1장 4절『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데스포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가만히 들어온 사람이란, 교회 안에 그런 사람들이 섞여 있는 것이다.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는 선지자들이 경고한 대로 이와 같은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로 되어 있는 경건하지 않은 자들이다. 경건하지 않는 의미는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한 것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경건하지 않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 통치자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데스포텐은 절대 통치자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들은 예수를 인정하지만 절대 통치자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도 예수를 믿지만 예수님이 우리의 절대 통치자라고 믿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말로만 그렇게 말하지만, 실제는 아닌 것이다. 예수님을 주여 주여 말을 하면서도 자기가 주인인 것이다.
1장 5절『너희가 본래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거짓교사들에 대한 경고를 구약의 하나님께서 내린 심판 세 가지를 설명하면서 거짓교사들의 비참한 최후를 예언적으로 선포하고 있다. 첫째는 출애굽한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내려진 심판이다. 영지주의로 미혹한 거짓교사가 출애굽하고 가나안 땅 앞에서, 들어가면 죽는다 라고 하나님의 약속을 부인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거부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거부한 자들과 같은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자들이다.
구약성경은 신약의 그림자다. 애굽을 나올 때 어린양의 피를 칠하고 어린양의 고기를 먹는다. 어린양의 피를 칠하는 내용은 두절 밖에 안되는데, 어린양의 고기에 대해서는 열절이나 된다. 날로 먹어서는 안되고 물에 삶아먹어서도 안된다. 구워서 먹어야 되며, 나머지는 불로 태워 없애야 한다. 죽임당한 어린양은 이 세상에 남겨두지 않는다. 그래서 보이지도 않는다. 어린양의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나타낸다. 그래서 죽어야 어린양의 피를 칠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피만 역사할 수 없다. 오늘날 많은 교회는 예수의 피로만 죄를 용서받는다고 말한다. 이 말은 완전하지 못하다. 예수님의 피가 적용되기 위해서는 죽은 어린양(예수)의 고기를 먹어야만 한다.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만 예수의 죽으심과 연합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피가 우리에게 역사하는 것이다. 그 때 하나님의 진노가 지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적용될 때는 광야에서 가나안에 들어갈 때다. 가나안은 그리스도의 예표다. 애굽은 세상을 예표하는 것이다. 구원은 애굽을 나온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애굽을 나와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다. 에스겔서 20장 38절에서『너희 가운데에서 반역하는 자와 내게 범죄하는 자를 모두 제하여 버릴지라 그들을 그 머물러 살던 땅에서는 나오게 하여도 이스라엘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니 너희가 나는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그 머물러 살던 땅(애굽)에서 나오는 것은 구원의 기회일 뿐이다. 반역하는 자와 범죄하는 자는 이스라엘 땅(가나안)에는 들어가지 못한다. 신약에서는 히브리서 3장 16-19절에서 인용된다.『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히브리서 4장 1절에서『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고 말한다. 광야에서는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 말한 적이 없다.『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하셨다. 확신이라는 말은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 말한 것이다.『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애굽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것으로『나 또한 세상으로 부터 못박히는 것』이다. 바로왕이 군대를 보내어 죽이려고 했다. 그 때 출애굽이 일어난다. 이것이 네가지 밭의 비유와 같은 것이다. 길가밭(마귀 때문에 말씀을 들어도 소용없다), 돌짝밭(어려움이나 환란 때문에 넘어짐), 가시떨기 밭(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 때문에 싹이 자라지 못함)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