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3 22-24

וַיֹּ֣אמֶר׀ יְהוָ֣ה אֱלֹהִ֗ים הֵ֤ן הָֽאָדָם֙ הָיָה֙ כְּאַחַ֣ד מִמֶּ֔נּוּ לָדַ֖עַת טֹ֣וב וָרָ֑ע וְעַתָּ֣ה׀ פֶּן־יִשְׁלַ֣ח יָדֹ֗ו וְלָקַח֙ גַּ֚ם מֵעֵ֣ץ הַֽחַיִּ֔ים וְאָכַ֖ל וָחַ֥י לְעֹלָֽם׃

וַֽיְשַׁלְּחֵ֛הוּ יְהוָ֥ה אֱלֹהִ֖ים מִגַּן־עֵ֑דֶן לַֽעֲבֹד֙ אֶת־הָ֣אֲדָמָ֔ה אֲשֶׁ֥ר לֻקַּ֖ח מִשָּֽׁם׃

וַיְגָ֖רֶשׁ אֶת־הָֽאָדָ֑ם וַיַּשְׁכֵּן֩ מִקֶּ֨דֶם לְגַן־עֵ֜דֶן אֶת־הַכְּרֻבִ֗ים וְאֵ֨ת לַ֤הַט הַחֶ֨רֶב֙ הַמִּתְהַפֶּ֔כֶת לִשְׁמֹ֕ר אֶת־דֶּ֖רֶךְ עֵ֥ץ הַֽחַיִּֽים׃ ס

 

와요메르(이르시되) 야훼 엘로힘 헨(보라) 하아담(이 사람이) 하야(되었으니) 케아하드(하나같이) 밈멘누(우리중) 라다아트(아는 일에) 토브() 웨라(악을) 웨아타(이제) (알까하노라) 이쉬라흐(그가 들어) 아도(그 손을) 웨라카흐 감() 메에츠(나무 열매를) 하하임(생명) 웨아칼(먹고) 와하이() 레올람() 와예살레헤후(그 사람을 내어보내어) 야훼 엘로힘 미간(정원에서) 에덴 라아보드(갈게하시니라) 에트(격조사) 하아다마(그 땅을) 아셀 루카흐(그의 근원된) 미솸(거기서) 와예가레쉬(이같이 하나님이 쫒아내시고) 에트(격조사) 하아담(그 사람을) 와야쉬캔(두어) 믹캐댐(동편에) 레간(정원) 에덴 에트 하케루빔(그룹들과) 왜에트(격조사) 라하트() 하헤렙() 함미트하페케트(두루도는) 리쉬모르(지키게하다) 애트(격조사) 데렉(길을) 에츠(나무의) 하하이임(생명)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 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개역개정)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그와 같이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가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정원에서 그를 내 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정원 동쪽에 천사들과 두루 도는 불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수정안)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이 사람의 히브리어 성경은 하아담이다. 하는 정관사이고 아담과 정관사가 있는데, 정관사가 있으므로 이름으로서 아담은 아닌 것이다. 이름에는 정관사를 붙이지 않는다. 그런데, 창세기 25, 7, 8, 15, 16, 18절에서는 사람으로 번역되다가 219, 20, 21절에서는 이름인 아담으로 바뀌었다. 사람으로 번역된 것은 첫사람 아담인 그리스도이시고, 이름의 아담은 남자인 아담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자가 분리된 존재인 남자 아담인 것이다. 왜 이렇게 다르게 번역했는가? 번역의 오류다. 하와가 범죄했는데, 하나님이 하아담(그 사람)을 쫒아냈다. 하와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그 이유는 아직 하와가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분리되기 전의 사람으로서 그리스도를 의미하며, 죄의 몸을 주기 위해 세상에 오신 첫사람인 것이다. 에덴에서 사람을 내보낸다는 말은 하나님이 스스로 첫사람(그리스도)이 되어 마치 쫒겨나는 모양으로 그려진다.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에서 우리 중이라는 단어를 보면 밈멘누(מִמֶּ֔נּוּ)이다.  그런데 창세기 217절에서도 밈멘누가 등장하는데, 그것으로 부터 라고 번역되어 있다. 문법적으로 남성 3인칭 단수이다. 그것은 나무를 의미한다. 창세기 33, 5, 11절에서도 같은 용법이다. 밈이라는 알파벳은 ~으로 부터의 부분을 의미한다. 나무로부터 전체 열매를 먹어야 하는데, 한 부분을 먹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무의 모든 열매를 먹으라고 했는데, 하와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는 말이다. 전체의 열매를 먹지 않고 부분으로 막으면 죽는다 라는 말이다. 그런데, 322절에서 밈멘누를 우리와 같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히브리어 성경의 단어에는『우리 중』이라는 말은 없다. 번역의 오류인 것이다.

그런즉『이 사람이 그와 같이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 같이 되었으니』라고 번역되었어야 한다. 아담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가 되었다는 말이다. 산악을 알게하는 나무가 된다는 것은 죄의 몸을 입는 그리스도가 연상되는 것이다. 그 사람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율법의 모양인 사람으로 되었다 라는 의미다. 범죄한 천사들로 인해서 하나님이 스스로 그리스도가 되고 죄의 몸인 육체가 되어서 세상에 첫사람으로 등장한 것이다.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라는 맛소라 번역본에서, 히브리어의 자음으로 의미를 추적해가면『우리 중』이라는 말이 없다. 모음을 붙이고 전체적인 의미를 재해석할 때 이런 내용이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한다.

오늘날 존재하는 모든 성경은 원본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보존되어진 사본을 비교 분석하여 만들어낸 것이다. , 이는 본문비평 연구의 결과에서 얻어진 산출물이라고 하겠다. 구약 사본은 파피루스 형태가 드물고 대부분 양피지에 기록한 것들이 많으며, 지금까지 발견된 사본 수는 약 1,000여개 정도로 추정된다. AD 2세기경의 랍비 아키바는 당시에 산재한 사본들을 집대성하고 정리하여 정통적인 히브리어 성경을 제정하고자 주창하였다. 이를 계기로 히브리어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많은 구약 주석방법이 개발되었으며, 히브리어 성경의 본문 내용을 구분하기 위한 절의 구분과 각종 부호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그 노력은 계속되어 마침내 6-7세기경에 맛소라 사본이 만들어짐으로써 결실을 거두게 되었다. 자음만 있던 히브리어에 모음을 달기 시작했는데, 그 작업을 주도한 유대인 학자들을『맛소라』라 불렀고 그들에 의해서 모음이 붙은 히브리어 구약성경을『맛소라 사본』이라 부른다. 모음을 붙일 때 자음 하나 하나를 분해해서 다시 재해석할 때, 원본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어의 단어를 분석하는 일은 중요한 일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구약의 원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므로 말미암아 인간이 하나님같이 되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늘날 대부분 교회의 생각이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사람이 선악을 알게하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하나님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라고 말하므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선악을 알게하는 것은 하나님의 고유 권한인데 인간이 그렇게 한다고 하니까 죄를 범한 것이고 사망에 이른 것이라고 말을 한다. 그래서 아담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므로 모든 인간이 죄를 지어 죽는다 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

성경에서 생명과 사망이라고 말을 할 때는 비록 육체적 사망을 말할 때도 있지만,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생명이고 하나님과 떨어진 것이 사망이라고 한다.『죽는다』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다는 말이다. 선악을 아는 것이 하나님 만의 고유 주권인데, 인간이 감히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므로서 선악을 알게 되었으므로 그게 죄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창세기 3 22-24절의 말씀이 있으므로 그것을 바탕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럴듯한 말이다. 그러나 창세기 3 22-24절에 기록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에 대해서 설명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 것도 고려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는 먹으면 죽는 나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이는 나무의 열매를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모든 열매를 먹으라고 하신 것이다. 부분적으로 막으면 항상 율법주의에 빠지는 것이다. 율법 속에서 문자적으로 보는 율법주의는 죄를 깨닫게 해주시고, 율법 속의 생명나무는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한다. 그래서 함께 먹으라는 말이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동시에 보여주시는 장면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에 의해서 부활의 생명나무를 삭제시키고, 오직 율법주의에 빠지도록 만든 것이다. 누가 그렇게 했는가? 바로 사탄의 생각을 가진 자일 것이다.

창세기 3 22절에서『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와 같이 하나가 되었다』는 말씀을 하셨더라도 하나님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성격을 그 이름 속에 담아두신 뜻을 이해하고 있었다면 당연히 의문을 가졌어야 하는 것이다. 의문을 갖지 않으니까 아담을 몇 천년 동안 파렴치한 나쁜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므로, 하나님처럼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고려하지 않은 인간들의 생각일 뿐인 것이다.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예수님이 하나가 되기 위하여 오셨는데, 창세기 3 22절에서는『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다』라고 말하는데, 교회사람들은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 라고 생각한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연합하여 한 몸이 될찌니라 에서 한 몸의 하나는『선악을 알게하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가 되었으니』의 하나(히브리어 에하드)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하나처럼 되었다』라는 것은 교묘한 술책이다. 본래는『하나가 되었다』 라는 말인데, 『하나같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어떻게 하나가 되었는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인 것 처럼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그것과 하나가 되었다』 라는 것이다.『아버지 하나님처럼 되었다』라는 말은 완전한 동질성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다.『하나님 처럼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라고 말해야 맞는 말이다. 예수님이 우리와 하나가 되기 위해 마지막으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모든 것을 마치면 우리와 하나가 된다는 것인데, 이미 창세기 3장에서 하나가 되었으면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이렇게 힘들게 기도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서 볼 때도『하나가 된 것 처럼』은 사단의 술수이요 거짓말인 것이다. 인간들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지 않았으니까 예수님이 기도하는 것인데, 마치『하나가 된 것 처럼』을 이용해서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인식하도록 한 것이다. 엄밀히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가 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예수님의 하나가 되게 기도하신 대로 하나가 되었으면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서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사단은 하나처럼 또는 하나같이 라는 말을 슬쩍 끼워넣으므로『하나』의 의미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가 아니라 권위에 도전하는『하나같이』의 의미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위해서 오신 것은『하나님처럼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이시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으면 바로 생명이 되는 것이다. 생명이 되었으면 죽어서도 안되고 겨나서도 안된다. 창세기 2 24절에서『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니라』에서 한 몸이 되라는 전제는 한 몸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몸이 아니기 때문에 한 몸이 되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너희는 다 그리스도와 분리 되어서 따로 떨어지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가서 너희 지체와 하나가 되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분리되었지만 반드시 지체와 하나가 될 것이라는 것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하나님과 하나가 아닌 존재가 되었다고 한다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죽는다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맞는 것이다.『하나가 된다』라는 것은 이렇게 분명한 동질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하나님처럼』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하나라는 의미도 아닌 불분명한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주 왜곡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들다라는 이쉬라흐(יִשְׁלַ֣ח기본형은 솰라흐7971)는 내보내다, 쫒아내다, 파송하다 라는 의미를 갖는다. (첫사람:그리스도)가 손을 들어(내어쫒겨)라는 것이다. 그가 하나님 나라로부터 세상으로 죄의 몸을 입고 내어 쫒긴 것을 말한다. 로마서 83절에서,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펨포) 육신에 죄를 정하사』헬라어 펨포는 파송하다 라는 의미를 갖는다. 히브리어 솰라흐와 같은 개념이다. 빌립보서 26-8절에서도 같은 말을 한다.『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은 그가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영생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고,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만 먹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자기 자신을 판단하여 죄를 발견하고 회개하여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부활에 이르라는 것이다. 그런데,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자기를 바라보지 않고 남을 행하여 율법의 잣대로 비판만 하니 율법주의에 빠져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말하는 것이다. 독사의 자식들은 사탄의 자식으로 율법주의에 빠진 자들을 의미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그(첫사람)를 에덴에서 아내셨다. 에덴에서 내쫒았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죄있는 모양으로 세상에 육신으로 태어나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로 분리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범죄한 영들이 세상으로 쫒겨왔다는 말이다. 그래서 첫사람으로부터 죄의 몸을 이어받아 인간들이 된 것을 의미한다.

땅을 간다에서 라카흐는 취해졌다 라는 의미를 갖는다. 문법적으로는 칼 동사 수동태 3인칭 단수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땅이다. 바로 물질세계이며, 흙으로 만들어진 육신을 의미한다. 땅을 갈다의 아바드는 제사장이 성전에서 예배하는 모습을 그리는 것이다. 섬김의 의미다. 그래서 왜 죄인이 되었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마가복음 1045절에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땅을 간다는 의미는 깊히 묵상하고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내용의 의미가 무엇인가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에덴에서 하나님께서 먹지말라고 하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므로서 아담과 하와가 물질의 땅인 에덴에서 겨났다는 것만을 생각하며 그 이상을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에덴을 왜 창설하셨는가?

아담이 세상에 창조되고 아담이 왜 세상에 오게 되었는지 아담은 왜 생명나무를 먹어야 되는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인간이 왜 세상에 오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주기 위해서, 즉 하나님 나라에서 일어난 일을 설명해 주기 위해 에덴을 창설하셨다 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믿지않고 이단적인 해석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담과 그 후손들에게 무엇인가 설명을 해야 될 것이 있는 것이다. 왜 세상을 창조하게 되었고, 아담은 왜 세상에 오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일정기간 동안만 유지되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 이유와 목적을 설명하시기 위해서 에덴을 창설하셨고, 에덴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설명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에덴을 하나님 나라라고 그렇게 설명을 하는 것이다. 에덴이 하나님 나라를 상징한다고 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에덴을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겨나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에서 겨난 일이다 라고 말하면 안된다. 왜냐하면 물질세계의 에덴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에덴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육신의 눈으로만 바라보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단은 자기의 왕국을 세상에 건설했다. 하나님 나라를 겨온 존재들은 다 사단의 자식들이고, 사단의 왕국 백성들이다. 이 땅이 자기 왕국이고 이 땅에 있는 모든 존재들이 자기 백성들인데 이 땅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의 일을 생각한다면 사단의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13장에서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35절에 이는『선지자로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로 부터 감추인 것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라고 하신 것이다.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이 옛 선지자가 말한 것처럼 옛 비밀한 것을 말씀하시려는 것인데, 옛 비밀한 것이 무엇인가? 창세로부터 감추인 천국의 비밀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씨뿌리는 비유 안에 무엇이 있는가 하면 천국의 비밀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있다고 하는데, 교회사람들은 모르는 것이다. 단지 천국의 비유를 통해서 인간의 마음 상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정도로 받아들인다. 사도바울이 아담에 대해서 이미 2000년 전에 설명을 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2000년이 지나도록 그 뜻을 모르는 것처럼,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창세로부터 감추인 천국의 비밀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는데, 안받아 들이고 있는 것이다. 알 수 있는 귀를 사단이 차단해 버렸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것이다.

마태복음 13 13절에『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라』라고 말씀하셨다. 대부분의 생각이 땅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땅에 있는 비유의 이면에 감추인 것은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단은 하나님 나라의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를 알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단의 백성들은 바로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지체요, 그리스도의 지체였던 존재들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를 보낸 아버지처럼 하나님은 사단의 꾀임에 속아 하나님 나라를 떠나겠다고 하는 지체들을 다 세상을 내 보내어 준 것이다. 그런데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처럼 하나님도 그의 지체들이었던 자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사도바울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듯이 사단의 권세 안에 있는 자들을 다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싶으신 것이다. 선지자들의 글과 하나님이 인간의 글을 통해서 계속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씨뿌리는 비유 안에 창세로 부터 감추인 천국의 비밀이 있다고 말씀하셔서 그 비밀이 숨어있는 것이 지금도 틀림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못찾아 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에덴동산에서 아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떠나기를 원하는 무리들을 하나님 없는 세상을 창조하셔서 내 보내주신 것, 아내신 것이다 라고 하는 말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것이다. 비유를 베풀어서 하나님이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인간들에게 말씀해 주시는데, 그것을 기어코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인간인 것이다. 세상적인 눈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영의 세계에서 물질세계로 왔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겨왔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로 부터 육신의 장막에 갇혔다 라는 말이 된다. 영이 물질세계에 존재하고 있다는 말은 영이 물질세계 안에 갇혔다는 말이다. 이사야 선지자도 이와 같은 내용을 설명을 하고 있다. 인간들이 흑암에 갇혀있으며, 포로된 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갇힌 자를 풀어주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인간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은 인간들이 갇혀있고 흑암 가운데 있다 라는 말이다. 그래서 구원하시겠다는 말이다. 이사야는 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다. 예수님이 갈릴리 근처 회당에 가셔서 이사야서의 성경 두루마리를 달라고 하고는 그 내용을 읽는 내용이 누가복음에 나온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늘 이 글이 응했다 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신 옥에 갇힌 자, 흑암에 갇힌 자, 포로된 자를 풀어주고 자유케 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이며, 예수님이 말씀 하신 그 날에 이 글이 응했다는 것이다. 교회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신 것은『죄에서 인간을 구원하시고 천국을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믿는데,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어디로 부터 구원을 받는지 알아야 하는 것이다.

구원이라는 것은 어디로 부터 구원을 받는지 알아야 하는데도 그 의미를 정확히 모르고 그냥 『죄로 부터 구원』이라고 믿고 있을 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떠난 자기의 지체들이 물질세계 즉 흙인 육신의 장막 집에 갇혀있는 것이고 영이 죽은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 속에 갇혀있으니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져 버리니까 사망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도 감옥에 갇혀버리면 외부와 단절되는 것이다. 옥에 갇힌 자, 흑암에 갇힌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셔서 구원하시겠다고 하는데, 교회사람들은 그런 내용들을 무시하고 『모든 인간은 죄인이므로 그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돌아가야 할 본향이 하나님의 나라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이 세상은 영원할 것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며 시작이 있으므로 끝이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멸망되어 질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없으므로 하나님이 안계시는 곳이다. 안식이 없는 곳은 하나님이 없는 세상이다. 하나님은 안식 그 자체인데, 이 세상은 안식이 없다. 안식이 있으면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안식을 주겠다고 왜 말씀을 하셨겠는가?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하신 후 땅에 에덴동산을 두어 아담과 하와를 두셨으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으므로 하나님이 에덴동산으로 부터 사람을 아내신 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에서 있었던 사건을 에덴동산 이라는 모형을 통해서 즉 땅에 있었던 일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사건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이 말을 천사들과 불칼로 하나님을 떠난 존재들이 생명나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지키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지켰다』라는 말은『감추었다』라는 말이다. 감추신 이유는 볼 수 없게 감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 속에 두었다』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천사인 것이다. 그룹(케르빔)은 지식의 천사라는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마귀가 말씀을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보호하는 것이다. 출애굽기 379절에서 『그룹들이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었으며 그 얼굴은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였더라』속죄소를 보호하는데, 속죄소 안에는 법궤가 있다. 그룹(cherub)은 천사인데, 법궤 안에는 맛나와 십계명,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있었다고 전한다. 즉 법궤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율법)이 있는 것이다.십계명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담겨져 있다. 호세아 46절에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두루도는(하파크) 불칼』에 대해서『두루도는』이 말은『뒤집어 엎는, 완전히 바꾸는, 변화시키는』이라는 의미다. 불은 창세기 3 2절에서 묘사된 것처럼 불꽃(여호아 하나님, 또는 여호와의 사자)이고, 칼은 성경에서 성령(또는 하나님 말씀)을 표현한다. 즉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생명나무의 길을 하나님이 지키시는데,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려면 천사들을 만나야 되고 두루도는 불칼을 맞아야 된다. 천사들을 만나고 두루도는 불칼을 맞으면 죽게된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기 위해서는 천사들이 지키는 율법을 통해서 자기의 의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감추어진 그리스도를 만나라는 것이다. 그러면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 주신다는 것이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기 위해서는『자기의 의가 죽어야 된다는 것』이 일차적인 의미를 담고있다.

천사들과 두루도는 불칼로 하나님의 생명나무의 길을 지켰다는 말은『감추었다』라는 말인데, 마태복음 13 9-17절의 씨뿌리는 비유를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넉넉하게 되되 무룻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예수님은 천국의 비밀을 비유로 말씀하시는데, 비유로 하시는 이유는 말씀 속에 생명나무의 길이 감추어져 있다 라는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이 율법을 천사가 주었다고 한다. 천사가 감추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곧 율법이라는 것이다. 법궤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십계명 즉 율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율법 안에『생명나무의 길을 감추어 두었다』라는 것이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는다. 죄는 하나님을 떠난 것이다. 교회사람들이 율법을 어기는 것이 죄라는 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나쁜 짓을 하는 것이 죄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죄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것이고, 율법을 통해서 죄를 깨달아라, 즉 하나님을 떠난 것을 깨달아라 하는 것이다.

율법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죄를 짓는 것을 깨달아라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있는 것을 깨달아라 하는 것이다. 깨달으면 하나님께서 돌아와야 하는데, 탕자가 아버지를 떠난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아버지께로 돌아갔듯이 율법에 의한 죄를 깨달으면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돌아가려는 마음이 있다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고 단순히 생각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하나님 나라를 떠나 올 때 하나님 나라의 처소를 벗고 육신의 장막 집을 입었다. 하나님의 장막 집을 얻으려면 육신의 장막 집을 벗고 하나님 나라의 장막 집을 입어야 한다. 육신의 장막 집을 벗는다는 것은 『죽는다』는 의미이다. 육신의 장막 집을 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지체였던 자가 하나님을 떠난 것이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회개하고 육신의 장막 집을 벗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를 원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육신의 장막 집을 버리는 방법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너희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그리고 마태복음 10 38절『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과 마태복음 16 24절『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라고 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시는 방법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땅에 있는 육신의 장막 집을 벗는 방법을 알려주신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이다. 즉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의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너도 나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죽으라는 것이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자기 생명을 버리는 자는 얻으리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앞의 자기 생명은 육체의 생명을 말한다. 그리고 뒤의 얻게되는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을 말한다. 육체의 생명을 버리는 자는 영생을 얻게되는 것이요, 육체의 생명을 얻으려는 자는 영생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체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떠날 때는 하나님의 장막을 벗었다. 다시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인간이 입고 있는 육신의 장막을 벗어야 하나님의 처소를 덧입을 수 있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 5 1절에서 이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사도바울이 그냥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육신의 장막 집을 벗어야 한다. 『세상을 떠나야 하는 말이 되고 죽는다』라는 말이 된다. 사단의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말이다. 요한복음 14 6절에『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이 길이라는 것이다. 무슨 길이냐 하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다. 그 길이 바로 십자가의 길을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이 가셨던 그 길을 예수를 믿는 모든 인간들이 십자가에서 죽을 수 있는가? 직접 죽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 말을 믿으라는 것이다.

믿는 것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로마서 6 3-4절에서『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즉 세례는 죽는 의식인 것이다.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었고, 내 새 생명을 위하여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는다 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신 약속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이 육신의 장막 집을 벗는 것을 보여주시고, 예수를 믿는 모든 인간들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함께 죽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십자가에 함께 죽은 것을 믿으면 육신의 장막 집을 벗었다는 것을 하나님이 인정해 주신다는 것이다. 로마서 8 3-4절에『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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