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밥과 르우엘의 신앙

 호밥과 르우엘의 신앙


 


민수기 10장 29-33절「모세가 모세의 장인 미디안 사람 르우엘의 아들 호밥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주마 하신 곳으로 우리가 행진하나니 우리와 동행하자 그리하면 선대하리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복을 내리리라 하셨느니라 호밥이 그에게 이르되 나는 가지 아니하고 내 고향 내 친족에게로 가리라 모세가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를 떠나지 마소서 당신은 우리가 광야에서 어떻게 진 칠지를 아나니 우리의 눈이 되리이다 우리와 동행하면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는 대로 우리도 당신에게 행하리이다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 일 길을 갈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 일 길에 앞서 가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호밥은 르우엘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사기 4장 11절에서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 중 겐 사람 헤벨이 떠나 게데스에 가까운 사아난님 상수리나무 곁에 이르러 장막을 쳤더라」라고 호밥에 대해서 표현된다. 개역개정 번역에 무리가 있는 것 같다.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 중” 이 부분을 히브리어 성경으로 보면,


 


מִבְּנֵ֥י חֹבָ֖ב חֹתֵ֣ן מֹשֶׁ֑ה (벤 호밥 하탄 모쉐) “모세의 처가 호밥 성의 자손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이드로는 제사장직의 이름이었으며, 르우엘은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다. 따라서 모세의 장인은 르우엘이다. 호밥은 모계사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호칭(모계호칭)이 되는 것이다.


 


그들을 두고, 모세와 호밥이라고 여겨, 호밥이 모세와 동행한 것으로 말을 한다. 아브라함이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가나안으로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들어갔으며,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도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서 행진하는데, 호밥은 미디안 사람으로서 고향 친척에게로 돌아가고자 했다. 모세가 호밥에게 동행하기를 권했지만, 그는 모세의 권유를 거절할 수 없어서 함께 동행하다가 가나안에는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장인 르우엘과 그의 아내, 두 아들은 가나안으로 들어갔다는 내용이 성경에 없다.


 


호밥이 들어간 가나안 땅과 장인 르우엘의 고향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영적인 눈으로 살펴보아야만 한다. 가나안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한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전쟁이 있다. 그 지역에 살던 족속들을 쫒아내야만 하는 것이다. 수많은 군인들이 목숨을 잃는다. 육의 눈으로 보면 보통의 나라가 다른 나라와 싸워 땅을 뺏는 것처럼 여겨지나, 이는 영적으로 성도의 심령 속에 새사람과 옛사람의 싸움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언약으로 성도의 심령 속에 성전(천국)을 세워주시지만, 그 옆에 무너진 옛성전이 있으며, 그곳에 자기라는 자가 앉아있는 것이다.


 


출애굽기 18장 10-12절「이드로가 이르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너희를 애굽 사람의 손에서와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백성을 애굽 사람의 손 아래에서 건지셨도다 이제 내가 알았도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하게 행하는 그들을 이기셨도다 하고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번제물과 희생제물들을 하나님께 가져오매 아론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와서 모세의 장인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떡을 먹으니라」


 


이드로는 미디안의 제사장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가 번제물을 가져오고, 하나님 앞에서 떡을 먹었다고 한다. 이로 보건데, 이드로의 신앙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미디안은 사사기에 이스라엘을 공격하기도 했다고 말한다. 미디안은 복술을 사용하는 이교신을 숭배하는 등 우상숭배에 빠진 것이다.


 


호밥(이드로의 처가)과 이드로가 같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두 갈래로 나뉘어 지는 것에 대해서, 한 쪽은 언약백성으로 하나님 중심으로 나가는 것이고, 다른 한쪽은 자기 중심 신앙으로 나가는 것이다. 호밥은 육을 지향하는 자를 상징하고, 이드로는 영적인 것을 지향하는 자로 상징된다.


 


이것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중심에서,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으로 선악과를 먹은 자기 중심의 신앙으로 변질된 것을 상징한다. 모든 우상 숭배가 바로 자기 중심의 신앙인 것이다.


 


기독교와 불교를 비교하자면, 유사한 점과 다른 점이 있는데, 유사한 점은 자기를 비우는 부분이다. 불교는 자기를 비워 부처의 열반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며, 기독교는 자기를 부인하여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이다. 가는 길이 유사하며, 종교 통합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다른 점은 불교는 자기가 중심이다. 자기를 비운다고 말을 하면서도 행위의 주체가 자기라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행위의 주체가 자기가 아니라,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기독교에서 자기를 비운다는 의미는 죽는다 라는 의미가 있다.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육적인 것의 죽음이다. 육적인 것은 본성, 유전적 요소, 경험이나 지식, 사상, 지배하고 싶은 욕망, 탐욕 등 육체로 부터 비롯된 모든 것이다. 헬라어로 프쉬케라고 하는데, 이것을 죄의 몸(육적 몸:fresh)이라고 한다. 죄의 몸을 프쉬케라 하면, 그 안에 있는 속성 하나 하나를 사륵스라고 한다.


 


스스로 인간은 이것을 죽일 수 없으므로, 중보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예수 그리스도가 대속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시므로, 그와 연합되어 죽는 자가 육적 몸에 대해서 죽었다고 하는 것이다. 불교는 이 같은 자기 비움을 온갖 행동으로 이루려 한다. 각종 수행을 통해서 이루려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것을 예수와 함께 죽었음을 믿음으로 받아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 내에서도 이와 같은 진리를 왜곡하는 자가 있는 것이다. 자신은 예수와 함께 죽지 않고, 예수의 죽음으로 인한 죄용서의 보혈만 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날마다 죄용서를 통한 예수의 피를 요구하므로, 날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있는 것이다.


 


불교는 스스로 수행을 통해서 자기를 비워 열반에 이르고, 부처가 되기를 원한다. 그것을 증명하는 자도 없고, 저절로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가 되는 길은 쉬운 것이 아니므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수행하다 보면, 윤회를 통해서 언젠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와 함께 죽었음을 믿으면, 부활하신 예수와 함께 믿는 신도도 자신이 부활한 것을 믿으며, 이로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는 부활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는 신도들이 많이 있는 것이다. 교리에 의하면, 부활은 죽었던 육체와 영혼이 다시 결합하는 것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부활은 죽었던 영이 살아나 하늘에서 오는 영의 몸과 결합하는 것이다. 부모로부터 받은 몸은 썩어지는 것이다. 성경은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호밥과 르우엘을 통해서 종교가 어떻게 변질되는가를 살펴본 것이다. 자기를 위하고, 자기 중심적이며, 자기의 의를 나타내고자 하는 모든 종교는 결국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 중심의 종교로 가는 것이다. 기독교 안에서도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을 하지만, 자기의 의를 내세우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했는데, 이는 열심히 노력해서 그렇게 되라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죽으라는 것이다. 그의 죽음이 곧 신도 자신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탕자의 비유에서 보듯이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의를 이루려 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탐욕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으라는 것이다. 그러면 부활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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