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복음과 율법주의

 

(7) 복음과 율법주의

창세기 2장 8-9절에는 에덴동산 이야기와 함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 나무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는 어떤 의미의 나무인가? 말 그대로 선과 악을 알게해주므로 이 나무의 정체는 바로 성경이다. 즉 성경의 율법에 해당되는 것이다. 율법을 바라보는 마음이 선으로 향할 수도 있고, 악으로 향할 수도 있는 것이다.

율법은 613가지나 되는 규율인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규율을 다 지켜라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지키지 못할 때는 희생제물을 가지고 와서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율법을 선으로 바라보는 자는 율법을 지키려고 하다가 자신이 죄인됨을 깨닫고, 희생제물을 통해서 장차 오실 메시야를 생각하게 된 자들이다. 극히 소수의 믿음의 선진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되는 것이다. 생명나무의 열매는 부활생명을 의미한다.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은 부활생명을 얻게 되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육체에 갇혀 하나님과 단절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생명을 먹게 되므로 하나님과 영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율법을 악으로 바라보는 자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켜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진 자들이다. 이들을 율법주의자라고 하며,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이 율법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사악하게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했다.그들은 악의 과실을 먹은 자들이다. 그 과실을 먹는 목적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먹는 것이며, 그 바탕에는 탐욕이라는 우상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율법이라는 성경의 말씀은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복음으로 전환되고 생명과실을 먹게 된다. 그러나 율법주의로 전환되면, 악의 열매를 먹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율법을 바라보는 두 마음은 복음과 율법주의이다. 그래서 율법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며, 그 속에 진리를 발견하면,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이고,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면 자신이 적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순종을 영적 성장으로 이루어지게 할 수 있는가 아니면, 완전한 믿음에 의해서 100% 이루어지는가? 순종을 영적 성장으로 연결시킨다면 율법주의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믿음으로 연결시키면 복음이 된다.

웨스트민스트 대요리 문답 78번에서, 왜 신자의 거룩하게 됨이 완성될 수 없는 것인가? 라고 질문을 하는데, 답은 다음과 같다.

『신자의 거룩하게 됨이 완성될 수 없음은 그들의 모든 부분에 죄의 잔재가 묵고 있기 때문이며, 영을 거슬러 싸우는 끊임없는 육의 정욕 때문이다. 이로서 신자들은 흔히 시험에 들어 여러가지 죄에 빠지게 되어 그들의 모든 신령한 봉사에서 방해를 받는다. 그래서 그들의 최선을 다해 한 일이라도 하나님의 목전에는 불완전하고 더러운 것이 된다.』

신자는 거룩을 완성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거룩을 영적 성장의 과정으로 보기 때문이다. 교리에 의하면, 성화나 거룩은 영적 성장을 의미하며, 신도가 성화나 거룩을 완전하게 이루지 못하므로, 성화나 거룩을 점진적으로 이루게 하시므로 역시 순종을 해 나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화나 거룩은 신도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용어이다. 하나님의 의가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율법주의는 열심히 노력해서 점진적으로 성화를 이루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성화나 거룩을 영적 성장의 한 개념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교리에서 순종이라는 용어를 등장시키는데, 신도가 하나님의 말씀에 100% 순종하는가 아니면 50% 정도 순종하고 나머지는 자기 생각대로 사는가를 성화나 거룩으로 연결시킨다. 열심히 노력해서 성화를 이루게 되면, 순종도 점차 발전해서 %를 올릴 수 있다는 개념이다. 그 노력을 도덕법이라든가, 규례를 통해 자기 통제와 함께 영적 성장을 이룰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트 대요리문답 91번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의무는 무엇인가? 답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의무는 그의 계시된 의지에 순종함이다.

그리고 문 92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그의 순종의 법칙으로 처음 계시하신 것은 무엇이었는가?”라고 질문하는데, 답은 다음과 같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특별한 명령 외에 무죄 상태에 있는 아담과 그가 대표하는 전 인류에게 계시하신 순종의 규칙은 도덕법 곧 신앙생활의 법칙이다.』

여기에 도덕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결국 도덕법이라는 율법의 굴레를 씌우는 것이다, 이것이 율법주의의 한 패턴이 된다. 나아가 문 93에서는 도덕법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과 답을 통해서 율법주의로 지향하게 한다.

『도덕법은 인류에게 선포된 하나님의 의지이다. 모든 사람이 개별적으로 온전하게 영원토록 이 법을 지켜 순종하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과 사람에게 마땅히 해야 할 모든 의무를 성결과 의로 행하도록 지시하고 요구한다. 이 도덕법을 지키는 자에게는 생명을 약속하고 이것을 위반하는 자에게는 죽음을 경고한다.』

이 도덕법을 지키는 자에게는 생명을 약속하고 이것을 위반하는 자에게는 죽음을 경고한다. 이게 바로 행위를 수반하게 하는 율법주의가 되는 것이다. 칼빈에게 도덕법은 십계명으로 요약되며, 모든 인류에게 요구되는 하나님의 도덕적 뜻이라는 것이다. 그는 구약의 율법을 도덕법, 의식법, 시민법으로 나누었는데, 이 중 도덕법은 폐지하지 않고 신자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삶의 규범으로 지속된다고 보았다.

칼빈의 제네바 교리 문답 224문에서, “율법에는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 방법이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이 율법의 명령에 따라서 살아야만 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답은 다음과 같다.

『그렇다. 그러나 모든 사람 안에는 항상 결함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이 율법을 완전하게 행할 수가 없다.』율법을 완전하게 행할 수 없더라도 율법의 명령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229문에서 “그러면 이 말은 비록 우리가 이 덧없는 삶의 날 동안 율법을 결코 성취할 수 없다 하더라도 율법이 우리에게 완전을 요구하는 것은 결코 무익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즉 이 율법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를 제시해 줌으로써 각자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따라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도록 만들어 주며 또 날마다 진보해 나아가도록 해 주기 때문이라는 것인가?” 라는 질문에 답은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한다. 즉 율법의 완전한 성취를 이루지는 못할지라도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순종을 율법의 한 패턴에 두고 완전히 지키지 못하더라도 열심히 노력해서 (성화를 이루어) 순종에 이르도록 한다는 것이다.

복음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을 바탕으로 하는데, 그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서,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연합되고, 부활과 연합되는 믿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거룩한 존재로 칭함을 받고 하나님 말씀에 100% 믿음으로 순종하게 된다. 이 순종은 신도가 행하는 순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하나님께 대한 순종에 참여하는 믿음의 순종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내가 ~을 해야지” 라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의지와 생각포기하고 성령을 통하여 나아갈 때, 완전한 순종에 이르게 된다. 이는 거듭난 자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순종인 것이다.

쟁점은 성경은 100% 믿음으로 순종하게 되지만, 교리는 이 외에도 도덕법 등 율법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열심히 노력하여 영적 성장을 이루어 순종에 이르게 될 수 있다고 한다. 순종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열심히 도덕법을 지켜 영적 성장을 이루어 순종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은 복음과 율법주의를 혼합하는 것이므로 선악과를 먹는 자들이된다. 선의 열매도 먹고 악의 열매도 먹는 혼합종교의 형태를 띤다.

오늘날 613가지 율법을 지키는 자는 없을 것이지만, 도덕법(십계명)은 지켜 나가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목사들이 많다. 신도들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되기 때문이며, 나아가 신도들도 악에 빠지지 않게 하는 방법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칭의보다 영적 성장이 중요시 된다면 이미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율법주의가 되는 것이다. 사도바울도 서신서에서 율법주의를 무척이나 경계를 했으며, 신도들이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당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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