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달란트의 비유
(8) 달란트의 비유
달란트 비유는 주인이 각기 다른 달란트를 가진 세 종에게 맡긴 것과 종이 행동한 결과에 대한 주인의 칭찬과 비난에 대한 비유인데, 이 비유는 신도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상황에 있음을 나타내어 준다.
그래서 달란트의 비유를 통해, 신도들은 하나님의 일과 봉사에 실제적으로 근면해야 할 필요성을 나타내고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과 타인의 선을 위해 애쓸 것을 달란트의 비유를 통해서, 권고받고 있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달란트 비유는 마태복음 25장 14-18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있다.『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의미한다. 타국에 간다는 말은 이 세상에서 있다가 하나님 나라로 승천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 아래 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율법을 이루시고, 회개하는 자의 죄를 다 가져가신 것이다. 예수님이 타국에 가실 때 종들에게 맏겨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이다. 이 복음을 어떻게 전했느냐 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복음전하는 것을 장사로 표현했다. “재능대로 금 다섯 달란트를 주셨다”라고 말하는데, 재능대로는 헬라어로 두나미스(권능, 능력)라고 하는데, 인간의 재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권능(병고치고, 각종 이적을 일으키는 것)을 따라 부활생명이 없는 것을 부활생명이 있는 것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금 다섯 달란트에서 헬라어 성경에는 금이라는 표현이 없다. 달란트는 헬라어 달란톤(히브리어 키카르: 떡덩어리)에서 발전했다. 다섯 달란트는 둥근 떡이 다섯개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다섯이라는 말이며, 모세오경(율법)을 상징한다.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참형상이 아니고 그림자이다. 율법(약속)은 그림자이므로 참 형상은 바로 부활생명이신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히브리서 10장 1절에서『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라고 했다.
구약에 나오는 속죄제사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그림자인 것이다. 온전하게 되는 것은 부활생명을 가진 자이다. 다섯 달란트는 모세오경을 의미하고, 이 모세오경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약속하고 있는데,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러 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두 달란트는 떡 두 덩어리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 생명을 떡(히브리어:키카르)이라고 했다. 떡 두덩어리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율법 속에 있는 자들을 의미한다. 예언의 말씀과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어서 이루어지면 그것은 하나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과 십자가에서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한 것을 믿으면 하늘 생명인 부활을 주신다고 했는데, 율법 속에 있는 자들은 예언과 성취함을 동시에 받았지만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모른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약속의 말씀과 이루어진 말씀을 통하여 알려 주셨는데, 왜 모르는가? 그 이유는 한 달란트를 받았는데도 땅에 감추었다는 것이다. 땅(육체)은 혼돈하고 공허한 곳이다.
그들은 어두운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들은 부활을 육체가 죽고 난 뒤에 일어나는 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육체 속에 갇혀 있다는 말이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장사를 해서 이윤을 남겼다.장사를 한다는 것은 영생하도록 있는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창세기에서, 일을 한다는 말은 땅을 경작한다(아바드)는 말이다. 씨를 뿌리는 일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생하도록 하는 일이 무엇인가 라고 예수님께 질문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라고 대답하셨다. 하나님의 일을 한 것이 바로 장사를 했다는 말이다.
떡 다섯 덩어리를 가지고 생명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일을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게 했다는 말은 율법에 나타난 진실을 잘 풀어서 설명해 주고 가르쳐 주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했다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생명의 떡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잘 전해서 부활생명을 얻게하면 장사를 잘 한 것이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바로 그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율법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바로 달란트 즉 하나님의 일을 장사할 수 있는 것이다.
장사를 해서 남겼다는 것은 부활생명이신 예수의 제자를 만들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제대로 전하지도 못한 것이다. 그리고 한 달란트 받은 자가 주인에게 변명만 늘어놓는다.
마태복음 25장 24-25절『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예수님 당시 율법주의, 이스라엘 유대 지도자들을 의미한다. 유대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 무서운 심판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주여 당신은 굳은(스크레로스) 사람이라”고 말한다. 스크레로스 라는 말은 박정하고 포악하며 거칠고 무섭다 라는 뜻으로, 종은 주인을 악한 인격자로 몰아세워 결국 자신의 불성실과 직무 유기에 대한 변명의 여지를 찾으려 한 것이다. 그는 주인의 인격을 매도하는 더 큰 죄를 주인 앞에서 범하였다.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라는 말에서, 종이 주인을 구두쇠나 돈을 모으는 데는 광적이면서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해 불로 소득을 얻는 파렴치한 인물로 그리고 있다. 이 비난 속에는 자신이 다른 두 종들보다 훨씬 적은 양을 받은 것에 대해 주인에게 불만을 분출하고 있는 것이다.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이는 추수한 곡식을 마당에 늘어 놓고 말린 후 키질을 하여 겨를 헤쳐서 곡식을 모으는 장면을 나타내고 있다. 주인을 키질하는 노력조차도 하지 않고 알곡을 모으려고 하는 불로소득자로 비난한 것이다.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주인을 굳은 두려운 자, 심지도 않고 거두는 자, 헤치지 않고 모으는 자 등으로 비난하고 있지만 실제는 그 비난이 한 달란트를 받아 아무일도 하지 않고 주인 앞에 나온 게으른 종 자신에 대한 묘사이다. 자신의 게으름이 주인으로부터 유발된 것이라는 간접 표현인 것이다.
이 두려움은 주인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즉 너무 엄격한 주인이기 때문에 혹시 자신이 장사를 하다가 실패하여 본전도 돌려 주지 못할 때 엄격한 주인에게 당할 벌이 무서웠던 것이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전혀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메시야를 알지 못하고 십자가에서 죽여버린 것이다.
종은 자기 나름대로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돈을 보관했다. 표면적으로는 자기가 주인의 원금에 아무런 손해도 끼치지 않고 잘 보존해왔다는 뜻이지만, 내 할 바를 다했으니 당신은 내게 아무런 꾸중도 할 수 없습니다 라는 뜻의 무례하고도 원망 섞인 불평이다. 이 말은 유대인들은 율법대로 열심히 지켜 의를 이루어 가므로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다는 것이다.
즉 주인이 자기에게 맡겨준 것에 대해서, 자기와 아무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을 당연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주인이 보관을 위해 달란트를 맡긴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성실히 활용하여 그에 따른 이윤을 남기라고 맡겼음을 알지 못한 것이다.
소유를 맡겼을 때는 그 소유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아 자기의 것이나 다름없이 성실하게 애정을 갖고 그 달란트를 맡아야 했었다. 하나님의 뜻은 죄를 통해서 메시야를 발견하고, 복음 속으로 들어오라는 것이다. 그러나 게으런 종은 그렇게 행하지 않은 것이다.
이와 같이 종이 주인에게 변명하는 것에 대해서 주인이 마태복음 25장 26-30절에서, 반박한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종이 주인에게 변명한 내용에 대해 반문하는 것이다.
이 반문의 의도는 주인인 자기 자신이 절대로 종이 말하는 바와 같은 그런 악질적인 구두쇠나 부도덕한 사람이 아님을 밝히는데 있다. 게으른 종에게 그렇게 반문함으로써 도리어 그 결과가 종 자신에게로 돌아가게 한다는 점이다.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게으른 종이 한 변명에 모순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즉 종의 변명대로 주인이 매정할 뿐만 아니라 원금을 손해볼까 해서 그것을 이용하기가 힘들었다면 적어도 안전하고도 손쉬운 방법으로 이윤을 불릴 수 있는 일이 또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 것이다. 이윤을 불리는 것은 메시야를 발견하는 일이다.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드리지 못할 망정, 메시야 자체는 인정했어야 하는 것이다.
취리하는 자들(토이스 트라페지타이스)은 돈을 맡아 보관하면서 이자를 주거나 수수료를 받고 돈을 교환해 주는 환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신약 시대에 이르러 유대 랍비들은 변리로 돈을 빌려주는 것과 고리 대금업을 엄격히 구분함으로써 돈을 빌려주는 무리들이 상당수에 이르렀다고 한다. 여기서는 부당한 이익이나 억압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통상적 관례에 의한 이자로 보아야 한다.
악하고 게으른 종 이라고 꾸짖는 정도의 심판이 아니라 그에 따른 물리적 징계가 있음을 보여 준다. 이 구절은 앞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에게 주어진 보상에 대비를 보여 주고 있다.
즉 더 큰 것을 맡기면서 주인과 종의 관계가 더욱 깊은 신뢰감으로 형성되는 착한 종의 경우와는 정반대로 악한 종의 경우에는 주인과 종의 관계는 악화되고 그 모습은 더욱 처참하게 된 것이다.
복음을 받아드린 자와 율법주의자들이 극명하게 갈라진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과 거룩한 사역은 인간의 불성실에 의해 훼손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 비록 게으른 자에 의해 조금 지연되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정하신 때, 정한 목적에 따라 자신의 일을 맡을 만한 자를 통해 끝내 성취하시고야 만다.
복음을 받아드린 자는 때로는 다섯 달란트를 받기도 하고, 두 달란트를 받기도 한다. 열 달란트를 맡은 자는 주어진 역할을 온전히 수행했던 자로서, 결국 주께서 주신 재능과 은사를 활용하면 할수록 더 크고 놀라운 은혜를 맛보게 된다는 점을 보여 주고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무릇 있는 자는 복음을 받아드린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함을 믿는 자들이다. 그들은 복음이 있는 자로서 부활생명이 풍족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은 율법주의를 여전히 행하고 있는 자들이다. 주인이 맡긴 일에 소홀히 하는 종은 율법주의자들로서 그 주인에게 아무 쓸모없는 자인 것이다.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착한 종에게 했던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라는 말과 반대적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바깥 어두운 데는 천국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음부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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