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예수님의 첫 이적인 가나 혼인잔치
(2) 예수님의 첫 이적인 가나 혼인잔치
교회사람들은 대부분 예수님의 첫 표적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심으로써 옛언약을 새롭게 하시고, 새로운 은혜의 시대를 열었음을 나타내셨다고 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신성 즉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신 것으로 생각을 하기도 한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사람들의 필요에 반응하신 분임을 보여주며,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성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날 수 있음을 시사한다고 한다.
물이 포도주로 바뀐 것은 예수님의 첫 표적이었다. 성경에는 혼인잔치에 대해서 세군데 나온다. 가나의 혼인잔치, 마태복음 22장에서 나오는 어떤 임금이 자기 아들을 위해 베푼 혼인잔치, 요한계시록에서 나오는 어린양의 혼인잔치이다. 세 혼인잔치는 모두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가나의 혼인잔치는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설명하기 위한 모형이다. 혼인잔치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떤 상태가 되어야 하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혼인잔치가 끝나기 전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말은 혼인잔치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혼인잔치는 온전한 혼인잔치가 아니라는 말이다.
완전한 혼인잔치가 되려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를 성경은 설명한다.
혼인잔치의 연회장에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물항아리가 여섯개가 있었다고 했다. 유대인들은 항상 외출하고 오면 사막지대라서 물로 씻어야 했다. 이것은 장로들의 유전으로 지키던 것이었다. 물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포도주도 하나님의 말씀이다. 물과 포도주의 차이가 있다.
예수님이 물항아리 여섯개에 물을 가득채울 것을 말씀하셨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즉 구약의 율법을 의미한다. 아직 복음이 나타나지 않은 상태에서 율법이 가득차게 되면 이 율법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된다는 말이다.
갈라디아서 3장 24절에서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한다. 그래서 물이 포도주가 되는 것은 율법 조항을 지켜 의를 이루려고 하다가 그것을 그만 두고 믿음으로 나아가 의로운 자가 된다는 것을 예시하는 것이다.
물항아리는 여섯개인데, 물이 항아리 입구까지 찼다는 것은 율법을 온전히 지키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율법을 온전히 지키려고 하다보면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려고 하다가 스스로 죄인임을 발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하는데, 발견하지 못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율법을 잘 지켜서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말은 물이 포도주가 되었다 라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말은 내가 믿는 믿음으로 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믿음 속으로 들어가 의를 얻는 것을 의미한다. 갈라디아서 3장 23절에서는 이를 믿음이 온다고 했다. 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는 것이다.
물은 구약의 율법이지만 포도주는 새언약의 피를 상징한다. 누가복음 22장 20절에서『저녁먹은 후에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마지막 유월절에 예수님은 새언약인 피라고 하셨다. 새언약은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사함의 비밀이 있고, 의인이라 칭함을 받는 놀라운 하나님의 새언약이다. 율법으로는 완전한 혼인잔치가 될 수 없지만, 새언약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잔치는 온전한 혼인잔치가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새언약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새언약은 로마서 6장 3절에서 처럼 죄인이 회개하여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연합되는 것이다. 그러면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이다.
“여자여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나이다”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혼인잔치를 말하고 있다. 완전한 혼인잔치가 아닌데, 물(율법)이 가득차므로 죄를 깨닫게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상징인 포도주(새언약: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온전한 혼인잔치가 된다는 것을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가운데, 거룩한 마음으로 율법을 온전히 지켜서 하나님의 의에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는 율법을 지키는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예수님은 율법에 의해 죽으셨다.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되는 자도 율법에 대해서 죽은 자인 것이다.
율법을 지켜 의를 이루고자 하는 자는 율법주의자로서, 예수님 당시에 유대 지도자들이 그러했던 것이며,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한 것이다. 오늘날 율법을 지켜 의를 이루고자 하는 자들은 날마다 예수를 죽여 그의 피를 구하는 자들이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신도들은 복음을 믿지만, 율법도 지켜 의를 이루어 나가려고 하는 자들이 많음을 본다. 왜 그런가? 신도들은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고 믿지만, 세상 속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보고 마음으로는 괴로움이 쌓이는 것이다.
아무리 믿음으로 의를 이룬다고 하지만, 현실적인 잘못된 행동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율법이 자신을 통제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지만, 날마다 십계명을 통해서 죄를 짓는지 짓지 않는지 자신을 살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신도들은 말한다. 그게 무슨 잘못이 있는가 라고 반문한다.
그들은 위로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 아래로는 율법으로 육의 잘못된 행동을 통제해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믿음과 행위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어간다고 말한다. 특히 야고보의 말대로 믿음이 있다 하고, 행위가 뒤따르지 않은 믿음은 헛믿음이라는 하는 말을 더욱 신뢰하는 것이다. 이 말에 대해서 반박할 수 있는가?
그러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율법을 다 이룬 것으로 하나님이 간주하고, 부활의 연합을 통하여 신도가 하나님의 의에 이루었다고 말한다. 거듭난 신도들이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비록 육적인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율법을 떠 올리지 않으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기억 속에서 율법의 조문을 떠 올리지 않는데, 신도들이 떠 올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심판의 대상이 될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믿음없는 자가 되는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은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서, 두려워하거나 믿음이 없는 자를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지겠다고 하셨다. 자신의 상태를 보고 마음으로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으로 나가는 신도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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