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예수님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사건

 

(8) 예수님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사건

예수님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사건은 세건으로서 마가복음 10장 48-49절의 맹인 바디메오의 눈을 뜨게 한 사건과 마가복음 10장 46-47절의 날 때부터 맹인된 자를 고치신 일, 마가복음 8장 22-26절의 벳세다 맹인의 눈을 뜨게한 일이다.

이 세 이야기들 속의 맹인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맹인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이시며,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맹인들의 눈을 뜨게 해주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①맹인 바디메오를 치유하신 예수님의 치료 사건

오늘날 목사나 신도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포기하지 말라고 한다. 주변의 방해가 있어도 맹인 바디메오는 눈을 뜰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더 크게 외쳤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 반응하라는 것이다. 바디메오는 망설이지 않고 예수님께 나아갔다. 그래서 신도 역시 예수님이 부르실 때 즉시 순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불필요한 것들을 내려놓고 믿음으로 나아가라는 것이다. 바디메오는 자신의 겉옷을 버리고 예수께로 나아갔다.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내려놓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 봐야 합니다 라고 목사는 권고한다. 이게 오늘날 목사들이나 신도들의 생각들이다.

마가복음 10장 46-47절『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에 들어섰는데, 가장 먼저 만난 것이 바로 여리고 성이었다. 여리고 성은 여호수아서에 따르면 단 칠일 만에 무너져 함락되었고 그리고 성벽은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이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의 의미는 성도의 옛사람이 무너짐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이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여리고 성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모습이다. 장차 이루어질 십자가의 죽음(옛성전의 무너짐)과 부활(새성전의 세움)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가복음 10장 48-49절『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맹인 거지는 영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는 자들이다. 율법주의 속에 갇혀 있는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오늘날 여리고 성을 통해서, 장차 이루어질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알지 못지 못하는 자들을 예표하는 것이다. 신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알지만, 현재적으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이루어지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가 나사렛 예수이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맹인이 나사렛 예수를 메시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마가복음 10장 50-51절『맹인이 겉옷(히마티온)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히마티온(ἱμάτιον)은 옷인데, 마가복음 6장 56절에서는 예수님이 입으신 옷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옷은 육적 몸을 상징하는 것으로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몸을 의미한다. 겉옷을 내버린다는 의미는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예수에게로 달려가 연합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맹인(하나님 나라에 대한 맹인)은 부활의 그리스도(메시야)와 만나서 눈을 뜨게 된다는 예표이기도 하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아나블렢소)』

아나블랲소(ἀναβλέψω)는 쳐다보다 라는 의미다. 누가복음 4장 18절에서『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튀플로이스) 자에게 다시 보게(아나블렢신)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여기에서 아나블랲신은 영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이다. 튀플로이스는 튀플로에서 유래된 단어로서, 교만하다는 의미를 갖는다. 교만하여 영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는 자를 의미한다. 바디메오는 메시야의 소식을 듣고, 하나님 나라에 알고자 하는 자를 상징한다. 예수를 찾아온 많은 유대인들은 바디메오와 같은 맹인인데,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알고자 찾아온 것이다.

마가복음 10장 52절『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휘파게 ὕπαγε)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휘파게는 “은둔하다, 아래로 향하다” 라는 의미가 있다. 당장 “나를 떠나가라”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을 낮추어라”는 것이다.

우월한 선민의식을 갖은 유대인들에게, 율법주의에서 자신을 낮추어 율법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라는 것이다. 믿음은 율법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믿음이다. 예수님이 자신(바디메오)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율법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발견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약속하신 여인의 후손을 발견하게 되고, “그 분이 날마다 드리는 제사의 영원한 대속의 어린양”이라는 것이다. 그런 메시야를 바로 앞에서 발견하였으므로 그는 상한 마음을 치유받게 되는 것이다. 치유받았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 바른 생각을 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게 구원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드렸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야는 로마를 무너뜨릴 그런 힘있는 메시야로 생각했다. 그들은 메시야를 발견했지만,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는 사실상 맹인 그대로인 것이다. 육적으로 눈을 떴을 것이나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여전히 맹인이 된다. 바디메오가 예수님을 만나 상한 마음을 치유받고 하나님 나라를 보게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구원에 이르게 되는 길은 상한 마음을 치유받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되는 것이다.

예수를 따르던 수많은 유대인들이 갑자기 돌변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소리쳤다. 물론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많은 유대인들이 마음에 찔려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신도 역시 교회로 인도되었지만, 현재적으로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되지 않으면, 구원받았다고 말을 할 수 없는 것이다.

②날때부터 맹인된 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의 치료

신도들은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의 삶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순종과 믿음이 필요하며, 또한, 영적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증언하는 담대함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께 우리의 영적 눈을 열어 달라고 간구하며, 그분의 빛 안에서 진리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교훈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적 어두움을 밝히시는 빛이며, 그분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9장 1-3절『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날때부터 맹인이 된 사람은 누구의 죄때문인가? 라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했다. 여기서 죄라는 것은 부모로부터 받은 죄의 몸인가 아니면 자기의 죄인가라는 것이다. 자기의 죄는 이 세상에 태어난 자가 자기의 죄를 안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맹인이 된 이유에 대해서, 예수님이『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말씀하셨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요한복음 6장 29절에서『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여기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에 대해서 요한복음 6장 39-40절에서 설명하고 있다.『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신도는 맹인이라는 말의 뜻을 깨달아야만 한다. 우리는 성경 속에서 문자적으로 표현된 것 이면에 하나님이 감추신 의도가 있음을 발견해야만 한다. 율법은 표면적으로는 율법을 잘 지키면 하나님이 의인되게 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면적으로는 율법 아래 있는 모든 인간들은 죄인이라는 것을 알려주신다. 맹인은 율법주의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 16-24절에서 바리새인들에게 소경이라고 표현하셨다. 율법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율법을 문자적으로 이해해서 말하는 율법주의자 바리새인들을『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말씀하셨다.

오늘날도 율법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율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것만을 가지고 이야기 한다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소경인 것이다. 율법의 규정에 매여있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소경들이다. 소경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율법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면 부활생명을 얻는다는 말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세상의 이야기를 세상의 이야기로 생각하면, 하늘의일을 알 수 없다. 성경은 하늘의 일을 세상의 일로 비유해서 설명해놓고 있다. 그래서 비유를 통해서 땅의 일을 통해서 하늘의 일을 깨닫지 못하면, 모두가 성경에 대해서 맹인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니고데모라는 랍비와 대화할 때『내가 땅의 일에 대해서 말을 해도 믿지 않는데, 하늘의 일을 말한다고 믿겠는가』라고 말씀한 적이 있다.

하나님이 첫사람을 만드실 때, 흙으로 빚어서 생기를 불어넣었다 창세기 2장 7절『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첫사람 아담은 죽어야 할 생명(죄의 몸)을 가졌으나,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죄의 몸에 대해서 죽고, 그와 연합된 자에게 하늘로부터 오는 새생명을 주신 분이다. 로마서 6장 6절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메시야이시며, 하늘로부터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실로암 물에서 씻는 것에 대해서 헬라어로는 “후파게 닢사이 에이스 텐 콜림베드란 투 실로암”이다. 이것을 다시 번역하면, “실로암 못 안으로 들어가서 씻으라”는 것이다.

닢사이(닢토)를 씻는다로 번역하므로, 얼굴을 씻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못 안으로 들어가서 씻는 것은 목욕의 개념이다. 즉 물안에 몸을 잠그라는 것이다. 이는 침례를 의미하는 것으로, 침례는 옛생명은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로마서 6장 4절『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상징적인 맹인은 죄인을 의미하는바, 부모로부터 내려오는 원죄설이 아니라, 죄를 담는 죄의 몸을 입고 있으며, 그 죄는 하나님 나라에서 있었던 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태어나면서 죄인이 되었으며, 하나님이 그들을 다시 하나님 나라로 돌려 주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정하시고, 메시야로 이스라엘 땅에서 태어나게 하셔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것이다.

그와 연합된 자도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여 하늘에 앉히심을 받은 자가 된다. 이게 하나님의 일이시다. 그래서 그것을 깨닫고, 죄의 원인을 알게될 때, 맹인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눈을 뜰 것이다. 스스로의 의를 가지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고 하다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의를 얻기가 불가능함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③예수님이 벳세다에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사건

벳세다에서 맹인을 고친 일에 대해서, 대부분 목사들은 세가지를 지적하며 교훈을 말한다. 첫 번째,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온 방식이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예수께서 만져 주시기를 구하였다. 이들은 예수님이 병을 고칠 수 있는 분임을 믿고, 적극적으로 그분께 나아갔다는 것이다. 예수님께 대한 신뢰를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신도의 신앙 여정에서도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치유 방식과 맹인의 대답에 대한 신도들의 생각이다. 예수님은 맹인의 손을 붙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고 그에게 안수하셨다. 처음에 맹인은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다닌다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한 번의 안수로 끝내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 후 다시 안수하시자 맹인은 모든 것을 밝히 보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과정은 신도의 신앙 여정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말한다. 신앙생활에서 겪는 변화는 종종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예수님은 신도들의 연약함을 아시고, 인내심을 가지고 도우신다는 것이다. 신도들이 예수님을 만날 때, 모든 상황이 즉각 해결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꾸준히 예수님께 의지하고 나아갈 때, 점진적으로 삶이 변화되고 온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중요한 점은 예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이다. 예수님께서 그를 집으로 보내시며 마을에 들어가지 말라고 명하셨다. 이는 단순히 물리적인 이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순종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래서 신도의 삶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순종하는 삶은 신도를 더 깊은 신앙으로 이끌어준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신도들에게 주신 명령들을 지킬 때, 더 큰 축복과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고 말한다. 즉 베세다에서 맹인을 치유하는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께 나아오는 태도, 점진적인 치유의 과정, 그리고 믿음과 순종의 중요성을 목사들은 강조한다.

마가복음 8장 22-26절『벳세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이르시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

한글 개역개정과 헬라어 성경의 내용은 상당히 차이가 있다. 맹인으로 번역된 뒤플론(τυφλὸν)은 교만하다는 의미를 갖는다. 눈으로 번역된 옴마타(ὄμματα)는 옾타노마이에서 유래된 것으로, “크게 뜬 눈으로, 현저한 어느 것을 향한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를 알지 못하는 자는 율법으로 눈이 향하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침을 뱉다 라는 프튀사스(πτύσας)는, “두루마리를 접다” 라는 의미가 있다.

보이느냐(블레페이스)와 보이나이다(아나블레파스)에 대해서, 예수님은 블레페이스로 물었는데, 맹인의 대답은 아나블레파스이었다. 블레페이스는 보다, 알다, 깨닫다 라는 의미가 있는데, 여기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깨닫느냐 라는 질문이다. 그런데, 육의 눈으로 보다 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질문하는데, 그는 육의 눈으로 대답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시 한번 시도하는 것이다.

나무 같은 것들[안드로푸스 호티(관계사) 호스(와 같은) 덴드라]에서,

덴드라는 드뤼스(상수리 나무)에서 유래된 것으로, 무화과 나무를 상징하며, 이스라엘을 의미한다. 이는 율법주의에 빠진 유대인들을 지칭한다.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는 자는 영적 맹인으로서 그가 보는 것은 율법주의만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걸어 가는(페리파툰타스 περιπατοῦντας) 것을 보나이다”

페리파툰타스(περιπατοῦντας) 는 행동하다, (말씀 교리 등에) 따르다 라는 의미다.

눈으로 번역된 오프달무스(ὀφθαλμοὺς)는 앞부분의 옴마타와 같이 번역했다.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는 영적 맹인에게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벳세다 맹인의 치유를 통해서, 율법주의에 빠진 자들을 그속으로부터 빠져 나오게 하기 위해 기적의 권능을 보여주신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관점에서 보지 않고, 권능있는 메시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를 무너뜨리는 그런 메시야로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는 그들을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는 그리스도로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적으로 죽어있는 병자들이 예수님의 손과 연합되어 죽고, 그의 손으로 일으키니(부활) 병이 다 고쳐진 것이다.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율법주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 속에 감추어진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을 깨닫게 해주신다.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오이콘 οἶκον)으로 보내시며 이르시되 “마을(코멘 κώμην)에는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오이콘은 집, 가정이라는 의미 외에 성전이라는 의미가 있다. 예수님이 그 사람을 성전으로 보낸 것이다. 이 성전은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천국)을 의미한다.

코멘은 마을이라고 번역되었는데, 마을은 이미 세워진 옛성전(돌성전)을 의미한다. 마을에 들어가지 말라는 것은 율법주의 안으로 다시 들어가지 말라는 것이다.

마가복음 8장 22-26절 내용을 쉽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하루는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있었는데, 어떤 율법학자가 예수님이 하시는 기적 등을 통해서 이 분이 하나님의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하에 예수님을 찾아오게 된다. 직접 혼자 찾아온 것이 아니라, 다른 율법학자가 이미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해서, 그 사람이 소개하므로 이렇게 성전에 있던 예수님을 찾아오게 된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자신이 찾아온 경위를 말하는 것이다. 자신은 율법학자이지만, 당신의 능력을 보니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들어갈 수 있을까요 라고 물었다. 이 질문은 마치 어느 날 밤에 니고데모가 은밀히 예수님을 찾아와 묻는 장면과 비슷하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좋지 않게 보는데, 율법학자가 예수를 만나서 이런 식으로 대화를 하면 문제가 생길 소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그런 사정을 잘 알므로, 이 사람을 데리고 성전 밖으로 나가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을 하는 것이다.

친구여, 하나님 나라는 율법을 잘 지켜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죄로부터 벗어나야 하고, 자기라는 육적 몸을 벗어야만 하나님 나라를 들어갈 수 있다네. 성전에서 희생제사를 하는데, 동물을 죽여서 각을 뜨는 것은 죄의 본성인 자기라는 육적 자아가 죽는 의미가 있는 것이요, 그 살을 불에 태우는 것은 옛사람이 죽는 것이요, 그래서 희생제사는 비록 동물이 대신 죽지만, 죄인도 죽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희생제사를 통해서, 날마다 죽는 동물을 대신해 메시야가 세상에 와서 백성들을 구원하겠다는 것이 성경에 있지 않는가. 그 메시야가 바로 나라는 말이야. 나를 통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들어갈 수 없지. 이제 좀 알아듣겠는가?

그런데, 이 율법학자는 조금은 알 것 같지만, 여전히 율법이 그의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 속 시원히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는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택하시고, 율법을 주셨는데, 왜 율법을 통해서는 하나님 나라를 들어갈 수 없는가 라고 계속 생각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다시 한번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설명하신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는 의미는 대속의 의미를 갖고 있으며, 이 대속한 자와 연합되어야만, 죽었던 영이 부활할 수 있는데, 내가 먼저 그렇게 될 것이고, 이것을 믿는 자도 부활할 것이라는 말을 잘 설명해 주었더니, 율법학자는 그제서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이 무엇인가를 깨달은 것이다. 바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에게“이제 돌성전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아니므로, 당신의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질 것이고, 그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서 예배하면 된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다시는 옛성전을 찾지 말라는 것이다. 옛성전에는 율법주의자들만 득실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옛성전도 찾지 말고, 그 안에 있는 율법학자들도 만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오늘날 신도들이 벳세다 맹인의 치유를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헬라어를 잘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복음과 율법주의의 차이를 모르기 때문에, 맹인과 같이 복음이신 예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한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혼과 영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하며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새것과 옛것의 비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