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골로새서 1장 1-12절)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알린 자니라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에베소서, 빌립보서와 마찬가지로 골로새서 역시 바울의 옥중서신들 중 하나다. 골로새교회는 바울이 방문해서 세운 교회가 아니라, 바울이 3차 여행 중 에베소에서 2년 동안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을 접한 에바브라에 의해 세워진 교회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골로새 지역은 소아시아의 동서 문물이 교차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교통과 무역의 중심도시로 일찍부터 이단 사상과 철학이 성행하였다. 따라서 이교도에서 개종한 골로새 교인들 중에는 여전히 천사숭배, 금욕주의, 율법주의, 영지주의 사상을...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빌립보서 4장 10-14절)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2차 선교여행 때 개척된 교회였는데,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보낸 헌금을 받아서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당시 바울은 3차 선교여행 후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유대인들에게 잡히고 그 후 로마 군인들에게 잡혔다. 그때 풀려날 수도 있었지만 황제에게 상소했고, 그래서 로마로 가게 되었다. 로마로 갔을 때 죄수들이 많았기 때문에 가벼운 죄수들, 특히 로마 시민들은 집을 세들어 살게 하며 가택연금을 했다.  바울은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이었기에 완전히 감옥에 갇혀 있지 않고 가택연금 상태였다.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옥중서신이라고 하는데, 바울이 로마에서 가택연금 상태였을 때 쓴 편지들이다. 바울은 가택연금 상태였기 때문에 생활비가 필요했는데, 본문을 보면 한 동안 빌립보 교회가 바울을 돕는 일을 소홀히 하다가, 한참 만에 바울에게 사랑의 헌금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자신에게 전부터 헌금을 보내려고 했지만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드디어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보내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자기가 궁핍하기 때문에, 즉 돈이 없어 어렵기 떄문에 불평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오히려 자신은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빌립보서 4장 8-9절)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무엇에든지 참되며』라는 말씀은 위선과 외식과 가식과 거짓과 허례가 없이 진실한 상태를 말한다. 로마서 3장 4절에 보면,『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라고 하였다. 모든 사람들은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서 참된 자가 되라는 것이다.  『무엇에든지 경건하며』사도 바울은 경건이란 표현을 디모데 전서와 디도서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이 단어는 사도 바울만이 사용한 성경의 용어이다. 디모데 전서 3장 8절과 11절에 보면 남녀 집사들에게 이 표현을 사용하면서 respect 즉 정중하고 정숙하며 존경 받을 만한 생활을 하여야 할 것을 분부하였다. 디도서 2장 2절에도 같은 표현을 썼다. 성도가 기도 생활을 성실히 하여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경건함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고 강조하였다. 경건함과 단정함이란 즉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낮추는 것을 말한다.  『무엇에든지 옳으며』하나님 만이 선하시다. 하나님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저울은 항상 수평을 이루신다. 하나님의 잣대는 언제나 모자람이 없으시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어디서나 옳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영원히 누구에게나 항상 옳은 사랑이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거듭난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한다. 왜냐하면 잃어버린 영을 찾기 위함이다.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의 죽으심은 그래서 좌편 강도의 조롱을 뛰어 넘는 사랑의 죽으심이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옳은 죽으심이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빌립보서 4장 1-7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여기서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빌립보 교회를 기둥처럼 섬기던 두명의 여 집사로 추정된다. 멀리 로마 감옥에 있던 바울이 이 두사람의 이름을 알 정도라면, 두 사람은 빌립보 교회의 유력한 여성 지도자였을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의 갈등이 빌립보 교회 자체를 흔들어 놓고 있었던 것이다. 빌립보 교회 교인들도 이 갈등에 휘말려서 마음이 흔들리고 믿음이 흔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말하는 것이다. 갈등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마음을 같이 하는 것이다. 자기라는 마음을 죽이고 오직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모든 것을 행하는 것이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빌립보 교회는 서로 대립하고 갈등이 있었으므로 교인들의 마음이 우울해 있었다. 바울은 이런 분위기를 해소하기 위하여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권면했다. 『주 안에서』라는 말은 그리스도로 말마암아 모두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되며, 이로 인해서 기뻐한다는 것이다. 사실 바울이 그런 ...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빌립보서 3장 13-21절)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지난 과거의 일들을 잊어버리라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거듭난 자는 하늘로부터 새생명으로 태어난 자다. 육체만 같을 뿐 내부의 것은 다른 존재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거의 기억은 육체 속에 그대로 저장되어 계속 떠오르게 한다. 그래서 과거의 기억들을 다 잊어라고 말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3장 28 절에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예수님 안에서는 헬라인, 로마인, 유대인, 자유자 종, 남자, 여자, 다 똑같다고 하는 것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바

(빌립보서 3장 12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사도바울은 어렸을 때부터 구약성경을 읽고 통달했고 메시야를 기다렸지만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가 메시야인지를 알 수 없었다. 그의 내적 생명은 예수믿는 자들을 잡아죽이고자 하는 생명이 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읽은 성경때문이었다. 그가 발견한 것은 율법이었다. 그는 율법 가운데 메시야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율법을 지키면서 메시야를 기다렸더니 그 메시야를 죽여버린 것이다. 율법이 그렇게 한 것이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게된 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 사람들이 나는 율법에서 벗어나 성령의 법을 따르고 있다고 말은 하나, 회개하지 않은 모든 자들은 갈라디아서 3장 23절처럼 믿음이 오기 전에 율법에 매여있다.  주님은 그것을 불쌍히 여기셔서 다메섹에서 자신을 나타내주셨다.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주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이 처럼 율법에 둘러싸여 있는 자들은 사울과 같이 성경에 통달한 자라도, 예수를 핍박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주님은 고난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신다.  예수님은 예수 때문에 사울에 잡혀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님은 오늘날도 예수 때문에 핍박받는 그들과 함께 있다. 핍박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신앙과 아무런 상관없는 자가 아니라, 자아가 죽지 않은 채 회개하지 않고『스스로 예수믿는다고 고백하고 구원받았다』고 하는 자들일 것이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그 때 사울은 놀랬다. 충격적이었고, 눈이 멀었던 것이다. 이런 사울이 바울로 변화되고 심지어는 고린도후서에서 말한 대로 셋째 하늘을 보고 왔다. 그런데 상세하게 간증하지 않았다. 그가 알고자 하는 것은 다메섹 체험, 셋째 하늘에 다녀온 것 등 이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빌립보서 3장 10-11절)『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그리스도를 믿음는 믿음은 하나님께로 난 의와 일치한다. 내가 믿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이다. 이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얻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얻게 위해서는 바울의 고백처럼 모든 것을 해로 여기는 삶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말씀은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고 한다』고 말한다. 그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이 바로『옛사람은 죽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였지만, 구한 것은 그리스도를 얻고자 했다. 회개하는 자는 그리스도로 부터 무엇인가를 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얻고 모든 것을 해로 여긴다는 것이다. 주님은『회개하라』고 했지『나를 믿으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욥은 자식이 다 죽고 재산이 다 날라가는 그런 상황을 맞이 했는데, 주님이 허락하셨다. 왜냐하면 그런 고통 속에서,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깨닫고『회개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욥이 오직 주님 만을 바라보고 살게 하신 것이다. 친구들은 욥의 신앙을 의심하고, 아내도 욥의 신앙을 비웃고 아무도 자신과 함께 하지 않을 때 오직 주님 만을 바라보게 된다. 그런데 놀랍게 욥에게 구속자 그리스도가 계시되는 것이다. 욥기 42장 5-6절에서『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라고 고백한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도 어떤 고통의 상황 속에 던져졌다면, 주님 만을 바라보며,『왜 나에게 이런 상황이 오게 되었는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이『회개하라』는 메시지를 깨달을 때 그리스도가 계시되는 것이다. 다윗은 그가 도망다니면서 쓴 기도가 시편이다. 다윗은『나는 사람이 아니라 벌레』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