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신앙의 핵심을 흔들게 하는 것들

(2) 신앙의 핵심을 흔들게 하는 것들

 

①십자가

오늘날 십자가는 교회 공동체의 상징으로 되었다. 기독교 국가라고 할 수 있는 서 유럽을 여행해 보면, 십자가는 무덤의 상징인데, 우리나라는 이와 상반되게 교회의 상징이 된 것이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미하며, 그래서 모두 죽은 자임을 나타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분리해서는 안되며, 이 둘은 반드시 동시에 함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교회 공동체의 상징이 된 십자가는 기독교의 완전한 가치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신도들이 십자가를 바라보면, 자신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으로 바라보는 자들도 있을 것이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므로, 그 십자가를 바라보는 신도는 죄에서 벗어났다는 마음으로 바라볼 것이다. 그러나 신도들이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이제 부활생명을 가진 자로서 행복한 마음을 가진 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오늘날 십자가는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으로 인한 죄 용서의 상징이지만, 신도 자신의 옛사람의 죽음이라는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래서 십자가를 바라보고, 날마다 죄 용서를 받기 위해 자기 집에 걸어둔다거나, 목걸이를 해서 다닌다거나 하는 것을 본다. 이미 십자가는 이런 의미에서 하나의 우상과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눈에 보이는 십자가가,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에 연합되는 죽음보다 더 신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대부분 신도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더 선호한다.

 

②성전이라는 교회 공동체 건물

보통 성전이라 함은 교회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성경에서도 하나님이 계신 곳이라고 했지만, 문제는 많은 신도들이 교회 공동체 건물을 성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배 드리러 교회에 간다』라고 말하는데,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릴 수도 있지만, 교회 만이 예배를 드리는 장소 라는 것은 아닌 것이다. 즉『교회 외에는 예배를 드릴 수 없다』라는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배당』이라고 말하는 것은 반드시 그 곳에서 예배를 드려야 되는 장소이기 때문에 예배당 이라고 하는데, 그 말도 맞지 않은 표현이다.

예배당이라는 이 말은 교회를 성전이라고 하는 것 보다는 상당히 괜찮은 표현이나, 교회 건물은 예배드리는 장소가 아니라는 말이다. 교회는 성도들이 모여서 성경 공부하고 친교도 나누고 예배도 드리는 장소이지, 예배 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곳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배당도 성전도 아닌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다 교회이다.

교회는 구약에서의 성전과 비교하는 경우가 많지만 예수님은 성전 건물이 아니라 거듭난 자가 교회가 됨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너희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임을 나타내는 의식이다. 그러할 때 성령의 역사로 거듭난 자임을 확인받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 건물은 성도들이 모이는 곳으로 여러가지 목적을 위해 수행하는 건물에 해당한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며,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성도들이 모이는 곳이 된다.

교회의 시작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승천하신 후에 성령이 임하셨다. 교회는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셨을 때부터 시작한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반석으로 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역사로 구원받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성도들이 모인 교회 공동체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기억하고, 성도가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은 자임을 다시 기억하며,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킨다는 것이다.

 

③각종 구약의 절기를 연상하게 만드는 현대판 절기

갈라디아서 4장 8-11절『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초대교회 당시에 그리스도인들이 된 유대인들이 여전히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 일들이 자행되었는데, 이는 메시야를 기다린다는 의미를 갖는다.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셔,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모든 뜻을 다 이루셨는데, 그들은 여전히 메시야를 기다리므로서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행동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가 현대판 절기를 지키고 기념하는 것은 구약의 절기와 상관없다고 말을 할지라도, 그들은 결국 현대판 절기인 날을 지키는 행위를 통해서, 기존 절기의 의미를 확장하는 의미를 갖는다.

대림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의미로서 11월말에서 12월 초에 절기를 지킨다. 사순절은 부활절을 준비하는 기간으로 부활절 전까지 40일간 진행한다.

부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로, 춘분 후 첫번째 보름달이 뜨는 다음 주를 지킨다. 성령 강림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후 50일째 되던 날에 성령이 임하신 것을 기념하여 부활절로부터 50일 후에 지내는 의식이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이 이루신 모든 것이 동일하게 이루어진 것을 믿는 자들이다. 그런데, 이런 절기를 만들어서 지키게 하므로서, 신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되지 못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신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결과를 통해서 감사한 마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일어난 일이 그들에게 놀랍고 그저 감사한 일이라는 것이다. 현대판 절기는 신도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을 부인하며, 더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④이름이라는 명사

마태복음 28장 18-20절『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제자를 삼는 이유는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권세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시 주기 위함이다. 첫째, 제자들에게 죄를 사해주는 권세를 주는 것이다.

요한복음 20장 22-23절『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성령을 받은 자는 죄를 사해주는 권세를 받는다는 의미다.

제자가 된 성도는 아무나 이런 권세를 행하지 않을 것이다.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죽었음을 믿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부활생명을 믿는 자에게 행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세례의식이다. 세례의식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의식인 것이다. 땅에서 제자된 성도가 이렇게 하면 하늘에서도 이렇게 된다는 말씀이다.

제자나 성도가 권세를 행하거나 의식을 행할 때, 그들의 손으로 하지만, 예수님이 그들의 손을 빌려 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예수님이 하시는 것이다.

요한복음 5장 43절『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따라서 아버지의 이름은 예수이다. 요한복음 14장 26절에서『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따라서 성령의 이름은 예수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는 말은 예수로 세례를 베푸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교회 공동체에서 세례를 줄 때, 예수라는 말은 하지 않고, 이름이라는 명사에 집중한다.

예수의 이름은 예수인데, 이름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게 만드는 것이다. 이름이라는 명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름인 예수가 중요한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줄 때, 예수가 빠진 세례는 무슨 의미가 있는지 살펴볼 일이다.

따라서 오늘날 예수라는 말보다 이름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므로, 이름이라는 명사가 마치 예수와 동일시하게 되는 모습이다. 문어체에서는 예수라는 이름이라고 표현을 할지라도, 구어체에서는 이름이라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능력은 이름이라는 용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게 있으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인 예수를 통해서 권능이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마치 이름이라는 용어에 권능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이름은 그 분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표현의 한 방법이지만, 그 분 자체는 아닌 것이다.

세상에서도 동명이인이 많이 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안에서도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많았다. 여호수아도 헬라어로는 예수이다. 오직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만이 권능을 가진 분이 되는 것이다.  

 

⑤교단과 교회내 조직화

교리에 의하면, 문 165. 세례란 무엇인가? 답. 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물로 씻는 신약의 한 성례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자신에게 접붙이고, 그의 피로 죄사함을 받고 그의 영으로 거듭나고, 양자가 되어 영생에 이르는 부활의 표와 인침이다. 이로써 세례받은 당사자들은 엄숙히 유형적 교회에 가입하게 되어 전적으로 오직 주께만 속한다는 약속을 공개적으로 고백함으로 맺어지게 되는 것이다 라고 말을 한다.

먼저 유형교회에 가입해야 하는데, 유형교회는 교회 공동체의 교단으로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문 62. 유형교회란 무엇인가? 답. 유형교회라는 것은 참 종교를 고백하는 세계의 모든 시대와 장소에 있는 모든 사람과 그들의 자녀로 구성된 한 단체이다.

유형교회에 대한 교리를 보면, 문 61. 복음을 듣고 교회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다 구원을 얻겠는가? 답. 복음을 듣고 유형교회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다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다만 무형교회의 진정한 회원만이 구원을 얻는 것이다 라고 말을 한다.

무형교회의 진정한 회원은 무엇인가? 교리문답 64에서 무형교회를 머리되시는 그리스도 밑에 하나로 모이며 장차 모일 택한 자의 총수라고 하므로, 오늘날 교단 아래 등록되어 있는 세례받은 신도들 중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를 의미한다고 말을 한다.

따라서 진정한 회원인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유형교회에 등록하여 세례를 받은 자이어야 하고, 세례받은 자 중에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라는 것이다.

세례받은 자가 유형교회에 등록되어 유형교회 회원이 되지만, 모두가 진정한 회원은 아니라는 말이다. 진정한 회원은 무형교회 회원이 되는 것으로 말을 한다.

교리에 의하면, 세례를 받고 유형교회에 등록되어 있지 않으면, 진정한 회원인 무형교회 회원이 될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다. 신도가 무형교회의 진정한 회원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유형교회와 무형교회를 엮어므로서 교회 공동체의 교단이나 조직의 중요성을 나타내려고 하는 모습이다. 오늘날 교단을 이탈하여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교회 공동체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이를 나타내는 중요한 결과인 것이다.

세례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유형교회에 등록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성경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⑥교회 안에서 또 다른 이미지

우상은 영어로 아이돌인데, 이 아이돌은 오늘날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상이라기 보다는 자신들의 비전을 투영시키는 이미지가 된다. 이미지가 마음 속에 자리잡으므로 그게 신앙을 바르게 하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기 예수를 앉고 있는 마리아 상에 대해서 우상화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미지화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중심 신앙의 가치를 왜곡할 수 있다.

또한 성탄절의 아기 예수 탄생을 축하하는 장면은 십자가로 다가오는 예수님의 사역에 정면으로 부딪히게 만든다. 교회에서는 각종 축하 행사를 통해 성탄절의 이미지를 왜곡하고 있다.

 

⑦성찬에서의 떡과 잔

누가복음 22장 17-20절『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 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성도 역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된 자라는 새 언약을 기억하게 하는 행사이다. 옛 언약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으로서, 땅과 자손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 땅은 가나안을 의미하지만, 새언약은 영적으로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천국)인 것이다. 약속의 자손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래서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자는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를 물려받고, 그의 백성이 된다는 말이다. 성도는 그러한 의미를 깨닫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 백성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이 말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잡히기 전날 성찬을 하면서 직접 제자들에게 빵을 떼어주고, 잔에 포도주를 부어주셨다. 이 날은 유월절이었다. 그래서 유월절 행사를 직접 하신 것이다. 유월절은 어린양을 잡아 문설주에 피를 바르고, 집 안에서 양의 고기를 구워먹었던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천사가 문설주에 피를 보고 지나간 것이다.

하나님이 예수님이 흘리신 피를 보고 모든 사람의 죄를 사해주는 것이 아니라, 신도에게 칠해진 예수의 피를 보고 그 신도의 죄를 사해주는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잔에 포도주를 붓는 것은 제자들에게 예수의 피가 칠해지는 것이다.

양의 고기를 구워먹는 것에 대해서 고기를 굽는 것은 불세례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창에 찔려 죽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와 연합된 성도 역시 창에 찔려 죽은 자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고기를 먹는 것은 부활생명을 먹는 것이다.

부활생명을 가진 자만 세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유월절 음식을 먹은 백성들은 모세의 인도를 받아서 출애굽을 시작했다. 오늘날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를 받아 율법의 그물로 덮혀있는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떡을 떼고 포도주를 마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표현하는 것이다. 먼저 떡을 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음에서 살이 찢어지는 것을 의미하며, 성도 역시 예수와 함께 살이 찢어진 것이다. 그리고 떡을 먹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연합되므로서 성도 역시 부활한 것임을 믿는 것이다.

잔에 포도주를 붓는 것은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상징하는 것으로, 성도 역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서 피를 흘렸으며, 신도가 잔을 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수인 성령을 의미하는 것으로, 성도 역시 영원한 생명수인 성령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성찬식을 잘못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떡을 떼어 먹고, 잔을 비우 마시는 것을 십자가의 죽음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부활에 대해서는 빠져 있다. 이렇게 되면 계속 죄를 마시고 먹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은 의미의 성찬에 있어서, 실제 떡(빵)과 포도주를 거룩한 것으로 생각하면서 먹고 마시는 자가 있다는 것이다. 거룩이라는 말을 구별된 것으로 해석하고, 성찬 역시 거룩하신 하나님을 위한 구별된 의식이므로 그 의식에 사용된 것들도 거룩한 것으로 생각하는 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상당히 구약의 율법주의적인 사고방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거룩은 물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물건을 대하는 신도의 마음에 있는 것이다. 어떤 마음으로 성찬에 대하는가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⑧목사가 왕노룻하는 것

신약세대에 와서 왕 같은 제사장은 성도를 의미한다. 베드로전서 2장 9절「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네가지로 말한다. 택하신 족속, 왕가의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백성이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죄인 사이의 중보자 역할을 했다. 동물을 죽여 그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므로 제사장이 죄인의 대리자로, 그리고 제사장은 하나님의 죄 용서를 주시는 은혜의 중보자로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갔으며, 그 분이 또한 성부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도 다윗과 같이 왕과 제사장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정체성을 말한 이유는 어두움(사탄:죄의 근원)에서 불러내고, 기이한 빛(하나님의 의)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목사가 설교할 때, 마치 자신이 제사장인 것처럼 유사한 복장을 하고, 설교하는 단상이 거룩한 곳이라는 생각을 신도에게 주입하여, 아무나 그곳에 서지 못하도록 하는 그런 시대가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가끔 그런 모습을 하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그들의 모습은 거룩하게 보이도록 애를 쓰는데, 설교는 세상 일로 가득하다면, 이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성도라고 믿는 사람이라도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왕이며, 제사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는데, 어떻게 자신이 그런 존재가 되는가 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와 행적을 같이 하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으므로, 함께 제사장직을 한 것이요, 함께 부활하였으므로, 함께 왕이 되는 것이다. 또한 성도는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진 자이다. 그래서 성도는 날마다 성전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 신도들을 위해 간구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3장 21절『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카우카스도 엔 안드로포이스)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가르 휘몬 에스틴)』

카우카스도 엔 안드로포이스(καυχάσθω ἐν ἀνθρώποις)는 사람들 가운데서 아무도 자랑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자랑은 오직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할 뿐이다.

교회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에게 명예심으로, 돈으로, 권력으로 자기를 내세우려고 한다. 이는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이 하는 것이다. 기복적인 신앙에 빠진 자들이 바로 이와 같은 자들이다.

『가르 휘몬 에스틴(γὰρ ὑμῶν ἐστιν) 』이 말에 대해서, 다시 번역하면, “만물이 너희를 위한 것임이라”. 성도는 세상 속에 있는 자가 아니라, 세상 위의 하늘에 있는 자이다.

에베소서1장22-23절에서『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교회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이다. 교회는 성도의 심령 속에 임재하시는 성전이며, 교회는 성도들의 연합체로 나타난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가 만물을 영적으로 충만케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을 전해야만 한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하늘의 군대가 되는 것이다.

히브리서2장8절에서『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하나님은 만물을 복종하게 하셨지만 그러나 아직은 만물 속에 있는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

만물 위 교회의 머리와 만물 안에 교회는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가? 교회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되기 위해 그의 군대가 되어야 함을 말씀해 주신다. 이기는 자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오늘날 만물의 복종됨을 보지 못하는 것은 군대됨의 교회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자는 하늘의 군대가 되지 못하고, 왕 같은 제사장이 되지 못한다.

 

⑨자기를 내세우게 하는 설교

오늘날 대부분 교회 공동체에서 하는 설교자의 설교를 들어보면, 하나님 나라의 것보다 세상에서의 삶에 대해서 설교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몰두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 거룩하게 사는 삶,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삶, 성화를 이루기 위한 삶 등이다.

기독교가 불교 등 다른 종교와 닮은 것이 있고, 차이가 있는 것도 있다. 타 종교, 특히 불교를 닮은 것은 남에게 선행과 자비를 행하라고 한다. 자기에게는 비우는 삶을 실천하라는 것이며, 그래서 신의 성품에 도달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을 실천하고, 남을 용서하고,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타인의 본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대부분 목사들이 말한다.

이 부분에서는 기독교와 불교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종교 통합을 주장하는 자들은 이런 배경을 두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은 근본적으로 희생정신을 발휘하고 봉사하고 사랑을 베풀고 하는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기가 주체가 되어서 판단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루신 일을 닮아가는 것은 어리섞은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한 것을 믿으면, 예수님이 이루신 일과 동일하게 이룬 것이므로, 예수를 닮는 삶은 무의미한 것이 된다.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여 죽고, 함께 부활함을 믿는 신앙이다. 그래서 이것을 전하는 것이 전도의 핵심인 것이다. 왜냐하면, 죽었던 영을 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목적은 이것이기 때문에 견뎌나가는 것이다.

죽었던 영을 살리기 위한 행동과 활동을 벗어나 단순히 자신이 무엇인가를 해야만 예수님을 닮는 삶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리섞은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것이다.

거룩, 성결, 성화 등의 말은 다 같은 의미를 닮고 있다. 목사들은 설교에서 이와 같이 되도록 노력하자는 말들을 할 때가 있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자는 말을 하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면, 하나님이 그저 그리스도로 인하여 거룩한 된 자임을 인정하시는데, 굳이 자신이 이렇게 되기를 노력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이는 거짓 교사들이 잘못된 교리로 말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교리에 의하면, 문 78. 왜 신자의 거룩하게 됨이 완성될 수 없는 것인가? 답. 신자의 거룩하게 됨이 완성될 수 없음은 그들의 모든 부분에 죄의 잔재가 묵고 있기 때문이며, 영을 거슬러 싸우는 끊임없는 육의 정욕 때문이다. 이로서 신자들은 흔히 시험에 들어 여러가지 죄에 빠지게 되어 그들의 모든 신령한 봉사에서 방해를 받는다. 그래서 그들의 최선을 다해 한 일이라도 하나님의 목전에는 불완전하고 더러운 것이 된다.

이 부분에 대해서, 신학자는 인간의 정체성을 영과 정욕으로 더러워진 육의 혼합체로 바라보았다. 육은 육체(소마)가 있는가 하면, 육신(사르카)도 있다. 정욕으로 더러워진 것은 육체가 아니라, 육신이다. 육체가 죄로 물들었다고 말을 하는 자들은 인간의 정체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영지주의에 물든 한 분파가 된다. 육체는 더럽지만, 영은 깨끗하다는 논리이다. 그래서 영과 육이 싸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육체는 생물학적 육에 불과한 것이다.

육의 정욕은 육신의 정욕으로서, 첫사람 아담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죄의 몸인 것이다. 죄의 몸에 죄가 담겨지므로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짓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거룩한 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죄의 몸이 죽어야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로마서 6장 6-7절『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신자들은 육의 눈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거룩하게 될 수 없다고 교리는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는 거룩하게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베드로는 성령세례를 받은 성도를 향하여 말하고 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교리를 신봉하는 자들은 예수님이 이루신 것을 믿지 않으며, 이는 주인이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가 주인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자기가 주인이 되면 자기라는 우상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자기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다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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